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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무신불립(無信不立)

by anarchopists 2020. 6. 16.

무신불립(無信不立)

 

종교적 삶이란 손익과 무관합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는 종교적 삶을 추구하게 되면 인간의 모든 문제들이 말끔하게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옳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종교적 삶, 좀 더 구체적으로 교회를 통하거나 절대자를 통한 믿음을 갖게 되면 인간의 유한적인 문제 혹은 삶의 불가항력적인 문제도 기적처럼 극복되는 경우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종교는 ‘관계’입니다. 종교는 신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 달리 어떤 정답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대자와의 진정한 관계 맺기가 종교의 정답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그를 통해서 절대자를 찾아가면서 진실된 삶을 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평화(pacem)란 그런 것입니다. 절대자를 신뢰하다 보니까 주어지는 결과로서 어떤 사람, 어떤 집단, 어떤 환경과도 척을 지지 않는 관계를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대립각을 세워서 적을 만들고 원수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는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한 첫 출발은 절대자와의 올바른 관계(Iustificati) 형성입니다.

절대자와의 관계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회복하면, 그 다음은 모든 존재자들과도 평화로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혹은 ‘믿음으로부터’(ex fide)는 다르게 표현하면, ‘믿음’이 절대자와 관계를 잘 맺는 첫 단추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신뢰회복이자 관계회복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은 절대자가 인간을 향한 믿음보다는 인간이 절대자에게 갖는 믿음, 절대자에게 향하도록 하는 마음의 상태를 요구합니다. 다만 손익을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적 삶의 손익을 따지고 안전장치 정도로 생각을 하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습니다. 믿음은 절대자로 나아가는 마음 자세요 신앙의 가장 초보적 단계입니다. 절대자에게 향하는 마음도 없는데다 내가 욕망하는 것을 충족해 달라는 요구만 한다고 해서 종교적 욕구가 다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망을 하고 맙니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이익이 되는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평화를 위한 인간의 조건입니다. 믿음은 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가식적인 신념체계가 아니라 절대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 부합하기 위한 신앙잣대입니다.

평화로운 관계야 말로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수직적으로는 절대자와의 안정, 평안, 올바른 관계뿐만 아니라 수평적으로는 이웃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 가는 중요한 내외적 상태입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 군비를 넉넉히 하는 것,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이 말하였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버린다.”자공이 여쭈었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식량을 버린다. 예로부터 모두에게 죽음은 있는 것이지만,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는 존립하지 못한다”(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顏淵>, 12장). “백성이 믿지 못하면/백성에게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한다”(民無信不立)는 이 말이 단순히 정치에서만 통용되고 적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政治)는 백성과 지도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正]입니다(政者正也. <안연>, 17). 올바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상호간의 믿음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권력을 위임할 수 없으며, 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가 없습니다. 나라가 서고 공동체가 서며 특정 종교집단이 서기 위해서는 믿음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수직적 관계의 올바름은 수평적인 올바름에서 더 나아가 평화로운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지향성을 띤 종교적 집단이나 종교적 삶이라 해도 반드시 평화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희망(spes)이 종교의 장치, 신앙의 장치, 삶의 장치로 작동되어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태를 갈망한다는 것만큼 현실을 버티게 만드는 게 없습니다. 그 바람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아예 절망의 나락으로 치달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현실과 비교하여 아직 오지 않은 시간과 그 결과를 기대합니다. 그것이 살아가는 힘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기대치를 지금 여기서 그려본다는 것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나로 하여금 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희망이란 일종의 현재를 살아야 하는 존재이유 같은 것입니다. 종교인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 비종교인이 갖고 있는 현재적 존재감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말입니다.

 

예수는 자신에게는 비존재를, 우리에게는 존재의 삶을 주었습니다!

 

절대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희망을 통해서 궁극의 상태인 자신의 사랑(caritas Dei)을 품게 하였습니다. 사랑은 희망이 닿는 마지막 지점에서 싹트는 신앙/삶의 정상입니다. 예수는 인간이 절망 곧 허약하고 용기 없고 힘없는(infirmi) 존재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의 죽음(mortuus)으로 인간의 죄의 상태를 무화시킵니다. 15세기 독일 최초의 산문작품이자 인문주의 작품인 『뵈멘의 악커만』은 요하네스 폰 테플(Johannes von Tepl)이 썼습니다. 그의 작품은 신의 법정에서 죽음과 논쟁을 하는 대화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죽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은 무(無)다. 그렇지만 어떤 것이다. 죽음은 삶도, 본질도, 형체도, 주체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무다. 죽음에겐 정신이 없고 또 볼 수도 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과 존재의 끝이요, 존재 없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또한 어떤 것이다”(Johannes von Tepl, 윤용호 옮김, 악커만, 신의 법정에서 죽음과 논쟁하다, 종문화사, 2020).

예수는 존재의 죽음으로써 비존재인 죽음(존재자의 죽음)을 무화시켰습니다. 존재가 사라짐, 존재가 없음을 오히려 존재의 드러남, 삶의 드러남, 그 삶의 드러남을 통하여 존재 그 자체인 절대자의 사랑이 드러나는 죽음의 사태에 몸을 던진 것입니다. 죽음은 존재의 없음이라는 무의 상태로서 절대적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존재의 없음을 무화시키고 다시 존재하도록 만든 예수의 죽음은 비존재의 죽음입니다. 그럼으로써 희망을 보게 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무한한 기대 속에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희망의 꼭대기에서 보여준 실낱같은 사랑입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서 종교의 역설을 발견합니다. 바로 옳은 사람(iusto)이나 착한 사람(bono)을 위해서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는 아예 가망이 없을 법한 절망적 존재, 죄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 나오기 어려운 존재를 위해서 죽음의 무(無) 속으로, 삶의 무(無) 속으로 자신을 내던졌습니다. 종교적 삶, 그리스도교적인 역설에서 강력하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의 사랑입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절망과 죄책, 삶의 유한성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편애(Vorliebe)했다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적 무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화시킴으로써 죄인을 다시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자의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살게 하는 힘입니다. 존재의 무로 치닫지 않고 빠져나오게 하는 삶의 희망입니다. 내가 없다 혹은 내가 없을 것이다, 라는 절망은 희망의 사라짐이 아니라 존재의 상실과 무 그 자체입니다. 절대자의 사랑은 이것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믿음에 기반하여 예수의 죽음이 가장 절망적인 상태와 죄의 유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무로부터 다시 살도록 했다는 것, 그것이 예수의 죽음이 갖는 역설이요 우리가 살아야 할 종교적 삶의 역설입니다. 성서는 역설(力說)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Christus pro nobis mortuus est).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cum adhuc peccatores essemus) 공자도 좋은 말로서 우리의 이해를 돕습니다. “군자(君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나쁜 점은 드러내주지 않지만, 소인(小人)은 이를 반대로 한다”(子曰 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 <顏淵>, 16장). 예수의 행위는 가히 군자의 행위라 해도 넘친다 할 것입니다.

(로마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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