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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사해형제(四海兄弟): 형제애적 평화

by anarchopists 2020. 6. 15.

신앙의 생존부등식, 형제애적 평화

 

신앙은 평화입니다!

 

경영학자 윤석철 교수님은 ‘기업의 생존부등식’이라는 개념을 학계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시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려면 일종의 부등식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등식은 생산자(공급자)의 입장에서 판매한 상품의 가격은 언제나 상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투입한 원가보다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등식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구입한 상품으로부터 느끼는 가치는 구입할 때 지불한 상품의 가격보다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결합한 이중의 부등식이 바로 이른바 생존의 부등식”이라는 주장입니다(신인철, 미술관 옆 MBA, 을유문화사, 2013, 79).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실존 양식으로의 생존부등식은 무엇일까요? 평화입니다. 절대자와의 평화적 관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세계 혹은 인간과의 평화적 관계를 맺고 살아야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 곧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것도 종교적 서비스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종교시장에 의해서 형성된 여러 종교적 생태계에서 유독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서비스를 고집할 때, 그 자기 동일성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이냐가 관건입니다.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 것에 비해 신앙적 이윤이 더 크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교전문가 곧 강론자(설교자, 집전자)는 자신의 해석학적 의미를 통해서 그리스도인(혹은 특정 종교인)으로서의 만족도가 커짐에 따라서 그 보람을 극대화하기를 원합니다. 평화가 그리스도인(종교인)의 자기 동일성이나 자기 정체성이라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과 개인의 삶에서 구현되는 그 모습이 많아지면 강론자는 종교적 만족도나 종교적 헌신도가 더 만족스럽기 때문에 좀 더 평화적 관계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전문가 혹은 강론자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은 그 설교의 해석학적 의미가 평화를 도출하고 그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를 지속적으로 질문할 것입니다. 만일 강론자의 해석학적 의미가 발생하는 힘이 약해진다면 신자들의 종교적 충성도나 헌신도가 낮아질 것입니다. 평화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삶의 표현입니다. 종교적으로 치환한다면 평화는 종교적 삶의 정수입니다. 그런데 모든 관계의 평화들이 깨지거나 아예 구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죄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죄란 신 앞에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 즉 자기(das Selbst)가 되기 위한 것은 평화적 존재(pacem, pacis)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은 절망입니다. 절망은 곧 죽음의 이르는 병입니다. 평화적 관계, 즉 절대자와의 평화적 관계, 사람과의 평화적 관계, 자연과의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죄인이요 절망에 빠진 채 죽음을 향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지금 내가 존재한다는 것, 현실적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은 평화입니다. 뜻을 같이 해서 평화롭게 살기 원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입니다. 종교인의 바람입니다. 신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평화를 맛보는(sapite, sapio), 평화의 냄새를 풍기는 그런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서의 모습, 절대자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밝혀주는 평화적 관계에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정말 절대자 앞에/안에 있는지, 절대자 바깥에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평화는 사람들을 묶어 주는 보편적인 끈이자 신앙인으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동일성)으로 살아가는 끈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전체성의 인정입니다!

 

오귀스트 콩트(A. Comte)는 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실증적 종교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이타주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해석적 범주에서 실증적이라는 말은 사실적이고 유익한 것, 정확한 것, 정밀한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런 지평에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완전성, 하느님의 전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척도는 평화와 친교(communicatio)입니다. 콩트가 주장한 것처럼, 그리스도교가 이타적 종교로서 평가받기 위해서는 평화는 하나의 사실이고, 평화는 유익한 것이고, 평화는 그 어느 것보다 더 엄격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양보할 수 없는 삶의 태도요 관계요 지향성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전쟁이 없거나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애오라지 하나님을 하나님의 전체성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영으로서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라면, 그 존재와 존재 사이는 분명히 평화라는 이념의 현실을 내포하는 절대자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체성입니다. 평화로서 전체성이요 대가 없는 사랑(caritas)의 실체이자 은총(gratia)의 선물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을 나란히 놓고 사람들을 위해 복을 기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상성(無償性)을 나누자고 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인들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친교(communicatio)입니다. 자기 자신, 자기의 본래성을 찾지 못한 사람들과 선물로서의 신의 마음을 나누면서 그 무상성을 알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기쁨과 삶이어야 합니다. 신앙의 생존적 부등식은 종교공동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의 부등식은 바깥에 있는 비종교인들이 바라는 바입니다. 종교, 곧 교회는 언제든 무한히 베푸는 하나님의 은총 공동체입니다. 은총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무상성을 보편적으로 나누는 것이 바로 포괄적 친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행위를 통해서 자기가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비종교인은 그 시혜(施惠)를 통해서 평화의 구체적인 삶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나누고 베풀고 받는 모든 부등식의 관계가 평화로 이루어질 때 종교의 이익과 이윤, 어쩌면 교회를 다니는 진정한 까닭과 명분, 그리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자를 통해서 얻어지는 나의 평화는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 평화에 의해서 종교적 평화를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동일한 평화정신과 심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종교의 바탕에 평화가 있구나, 하는 사실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자기 자신임을 절대자에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죄인으로서의 굴레를 벗어나서 진정한 자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비종교인도 평화를 통해서 만나고 소통해야 합니다. 평화는 절대자의 자기 전달 방식이요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삼위일체라고 교회가 고백하는 것은 세 위격적 존재가 평화적 관계, 사랑의 관계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절대자 사이의 상호성은 친밀함과 자신의 적극적인 내어줌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전범으로 여기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바탕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평화는 공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우가 근심스럽게 말하였다. “남들은 모두가 형제가 있는데 저만이 홀로 없습니다.” 자하가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군자가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순간도 소홀함이 없이 노력하며, 남에게 공손(공경)하고 예(의)를 지킨다면, 온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형제입니다.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司馬牛憂曰 人皆有兄弟 我獨亡 子夏曰 商聞之矣 死生有命 富貴 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 <안연>, 5장) 논어에 나오는 교훈입니다. 온 인류가 형제가 될 수 있으려면 공경과 예가 필요합니다. 평화적 관계의 포용성도 중요하지만 친교, 통교, 교제가 가능한 존재, 즉 형제애가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와 같은 상호 존중과 인정, 그리고 존경과 예, 상호성에 입각한 평화로운 관계, 평화로운 공동체가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종교인)이 그에 대해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2고린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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