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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하느님이 하고픈 말(로마 8,6-11)

by anarchopists 2020. 3. 30.

하느님이 하고픈 말(로마 8,6-11)

 

하느님이 하고 싶은 말과 인간이 하고 싶은 말은 다릅니다!

멀리서 초월자의 목소리가 아롱아롱 들리는 듯하다가도 내 몸(carnis, 육체)과 세계를 보면 온통 욕심과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몸은 밥을 달라하고 잠을 달라하고 사랑을 달라하고 옷을 달라하고 얼굴을 치장해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몸을 갖고 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지나치면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몸만 돌보려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동물도 식물도 함께 더불어 공존하려고 내 곁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인간인 나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욕망입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 Heine)<꽃이 하고픈 말>에서 참 아름다운 시어들을 늘어놓습니다. “새벽녘 숲에서 꺾은 제비꽃/ 이른 아침 그대에게 보내 드리리/ 황혼 무렵 꺾은 장미꽃도/ 저녁에 그대에게 갖다 드리리/ 그대는 아는가/ 낮에는 진실하고/ 밤에는 사랑해 달라는/ 그 예쁜 꽃들이 하고픈 말을.”

꽃은 사시사철 그냥 보아도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 꽃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침저녁으로 수고하여 보내는 손길에는 설레고 애틋한 마음 한 가득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꽃으로 시시때때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연인의 마음은 순수합니다. 유한적인 몸의 이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저편을 염원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후반부에 하이네가 표현한 말들이 그것을 암시합니다. “낮에는 진실하고, 밤에는 사랑해 달라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도 유한이 아니라 무한을 꿈꾸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바로 생명과 평화”(vita et pax)입니다. 시인의 말로 진실과 사랑은 꽃이 지닌 속성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속마음을 담은 꽃말이자 순수한 정신입니다. 유한을 생각하면 인간은 몸만 생각할 것입니다. 재산, 노후, 자녀, 학벌, 명예, 권력, 자동차, 아파트... 이러한 것들은 종교가 바라는 초월, 즉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낮에는 진실하고 밤에는 사랑을 하는 순수함과도 맞닿지 않습니다.

까뮈는 말합니다. “비굴한 것이라 할지라도 육체는 나의 유일한 확실성이다. 나는 육체로서 살 수밖에 없다. 피조물이 나의 조국이다. 이것이 바로 대수롭지 않은 부조리한 노력을 선택한 이유이다. 이것이 내가 투쟁의 편에 선 이유이다.” 멋있고 당찬 주장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유한적인 몸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습니다. 유한적인 고깃덩어리(sarx)에 치중된 삶은 일순간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생명과 관계의 평화(만물평등주의)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생명이고 평화라면,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우리의 유한적인 육체의 욕망과 욕심하고는 다릅니다. 하느님은 정신(Geist)입니다. (pneuma; spiritus, )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나아가 우주와 호흡하려는 영적인 기운[靈氣]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간의 마음속에 꽉 들어찬 과망(過望)은 정신이 아니라, 성령(Spiritus Dei)이 아니라 몸이요 물질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Qui(어떤, 무슨, ) autem(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in carne sunt, Deo placere(기뻐하다) non possunt(할 수 있다, 가능하다, 효력이 있다]. 적어도 종교는 그러면 안 됩니다. 지금의 종교가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보이는 것(the Visible)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the Invisible)인 인간의 마음에 더 깊이 들어가, 그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려는 노력은 게을리 했습니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연하여 얻는 것이 없고(도리를 몰라 어둡고, ),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爲政>, 15)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습관적으로 육체보다는 정신(영혼), 유한보다는 무한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배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움도 매번 자기의 생각을 살피고 마음을 읽고 성찰하지 않으면[不思] 다시 육체와 유한으로 갑니다. 내면을 생각하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태도변화를 하지 않으면-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 Husserl)이 말한 고전적 인습에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으면-신앙습관, 생활습관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생각만 하고(단편적인 생각만 하고, 독단적인 사색만 하고) 결코 깊은 공부에 들어가지 않는 종교인도 위태롭습니다. 겉만 알고 속은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Denken)과 배움(Lernen)은 둘 다 앞의 선각자의 전승이나 창교자의 예지(叡智)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유하고 또 사유하여 얻어진 깊은 진리는 반드시 모방하여 몸으로 체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몸으로 체현한 것이 정말 잘 되었는가를 알려면 다시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한 깊은 생각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영적이고 정신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 몸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얼른 고쳐야 하는데, 그것은 사유로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이네 시인이 말한 진실과 사랑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은 그러한 지속성과 일관성, 보이건 보이지 않건 여여한 삶과 신앙의 자세를 일컫기 때문입니다. 순수를 지향하지 않는 종교는 결국 유한성과 물질, 그리고 육체에 한정되는 세속으로 치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그것을 경계하여 육체가 아니라 마음, 정신, 영혼에 가치를 두는 성령의 사람(Spiritum Christi)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신의 향유자(Genießer)입니다!

몸이 마음과 구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이원론입니다. 이분법적 사유가 한 때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적이 있습니다. 육체를 폄하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오직 영혼만 앞세우는 엘리트 종단이었던 영지주의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단을 규정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대의 종교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내면의 영, 정신에 따라서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신을 향유하고 있는가, 최소한 사회나 세계가 모범으로 삼을만한 정신적 깊이를 지니고 있는가를 가늠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 혹은 정신에 따라서 삶을 살면 그리스도인 안에 예수가 살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살지 못하고 오히려 더 유한적이고 육체적이며 물질적인 가치에 충실하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는 없는 것입니다[Si(만일 ~이라면) quis autem Spiritum Christi non habet, hic(, 이것, 이 사람, 이 점에 있어서, 지금) non est eius(그의)].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그리스도는 인간의 물질적, 유한적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억누르는 제도나 체제, 구조에 의해서 희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적 구조, 국가 체제나 관료제도가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을 억압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서 살려고 한다면, 하느님은 인간의 삶속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나타나는 것은 물질적, 유한적, 육체적 가치의 보상이 아닙니다. 오롯이 세계에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뭇매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선각자나 창교자의 지혜와 순수한 정신에 따라서 살지 않는 종교는 그만큼의 상식적인 연민을 얻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신을 좋아하고 하느님의 영에 촉각을 곤두세워 살아가려고 할 때 초월자와의 관계가 바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논어<八佾篇> 12장에 공자께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실 때에는 조상께서 살아계신 듯이 하셨고(마치 앞에 계신 듯이, 如在), 다른 신께 제사 지낼 때에는 그 신이 와 계신 듯이 하셨다(祭如在 祭神如神在),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계신 듯이혹은 와 계신 듯이라는 말은 달리 현존(現存, praesentia; Präsenz; Existenz)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도 될 듯합니다. 앞에 사실인 것처럼, 초월자가 진실 혹은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인식하고 믿는 자세가 신앙인의 올바른 예배 행위이자 삶의 태도입니다. 신과의 올바른 관계(propter iustitiam, 신과 올바르게 곁에 있음, 신의 올바름 가까이에 있음, 신이 볼 때 적법하고 지당하고 정당함 옆에 있다는 것)는 마치 있는 듯이, 와 있는 듯이, 앞에 나타나 있는 듯이 인식할 때 그분을 신으로서 대우하는 것이요 모시는 것입니다(vergotten; bedienen). 또한 불가타 성경의 번역을 빌리자면 신과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si tamen(그러나, 그러는 동안) Spiritus Dei habitat in vobis].

예수가 인간에게 시중을 든(dienen) 최고의 행위는 죽음(mortuus)입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정신적 향유를 잘하라고 인간을 극진하게 모셨습니다. 마치 하느님을 대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죄(peccatum)의 노예 신분(diener)에서 구원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영혼이 죽은 노예상태로 전락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소한 정신적 육체는 몰라도, 단지 육체 덩어리나 물질에 경도된 노예, 즉 배금주의자(Mammondiener)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다시 유한성 안에 갇힌 노예와 같은 신분(dienerschaft)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 혹은 예수의 정신은 인간의 엷은 숨결이 아니라 강하고 짙은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인은 그 거룩한 숨결로 즐거워하고, 순수한 절대정신으로 깊은 만족을 누림으로써 초월에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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