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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종교의 작동 원리(에페 6,10-20)

by anarchopists 2019. 10.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8/28 23:04 ]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작동 원리(에페 6,10-20)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의 위기는 잘 간파하면서, 그에 비해 정작 신앙의 위기는 잘 못 알아차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좀더 면밀하게 따져보면 둘 다 잘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살인, 폭염, 홍수, 테러, 교통사고, 화재 등 수많은 위기와 위기의 가능성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말한 이른바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과 연관된 것들입니다. 위기의 사건과 사고들은 인간 사회 그 자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전체로서 조직, 작동되고 있는 인간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들이 나타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사회적 부검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따라서 사회적, 조직적 문제의 해법이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일상의 위기가 개인의 문제, 개인의 태만으로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 조직망, 혹은 사회라고 하는 구조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위기는 어떤가요? 신앙도 개인의 신심에 따라서 신앙이 상승하기도 하고 추락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신앙도 공동체라고 하는 종교적인 고질적 구조나 제도, 그리고 기형적인 관계망과 경직된 체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악마는 방어를 할 여력을 주지 않고 틈을 통해서 공격합니다. 신앙적 사실이나 신심을 일으키는 사실조차도 흔들리게 만듭니다. 그럴 때,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개인의 잘못으로 자신의 종교와 멀어지거나 심지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비상식적인 구조나 비정상적인 체제를 보지 못하고 개인 탓으로만 돌립니다. 또 구조나 체제 유지자들은 교묘하게 개인을 몰아세워 조직과 구조의 잘못을 뒤로 감추려고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가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한 메커니즘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로는 먼저 '진리와 정의'를 말합니다. 종교의 무기는 무엇보다도 진리(truth)와 통합(통전성, integrity)이어야 합니다. 횔덜린은 “그러나 우리는 신적인 것을 또한 너무 많이 받았다. 그것은 불꽃으로 우리 손에 쥐어졌고, 강안과 바다의 밀물로 주어졌다”(<평화의 축제>)고 말합니다. 종교가 신앙을 간직하면서 올곧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도구는 신적인 것으로 주어진 진리와 통전성의 관계입니다. 진리를 통해서 전체를 지향하는 태도, 그것은 와해나 왜곡, 그리고 갈등과 반목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는 것, 전체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적인 것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비신앙적 구조와 비본질적인 조직으로 인해 떠밀려가면서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손에 쥐어 진 듯, 우리의 눈앞에 감각적으로 주어진 듯이 그렇게 신적인 것, 곧 진리와 통전성을 구체적인 신앙으로 표출한다면 악의 세계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신앙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그와 같은 진리와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많이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신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종교의 순기능적 작동 원리는 “평화”입니다. 평화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평화라는 말이 없는 것이 더 평화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횔덜린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신은 항상 절제를 알리며 오로지 한순간만 인간의 거처를 어루만지니 알 듯하나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언제인지?” 평화란 은밀한 것, 조용한 것, 침묵적인 것, 석양과도 같아서 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횔덜린이 신이 절제를 알린다고 말한 것도 평화란 부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평화라고 해서 기분이 붕붕 들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온 듯 안 온 듯 일순간에 신적인 존재가 스쳐지나가면서 인간의 삶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질 때 평화가 도래하게 됩니다. 소리를 지르면서 평화를 외친다고 해서 평화가 정착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가 발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보면, 걸음걸음 마다 내딛는 것이 자연스러움, 즉 내가 신발을 신었는지 안 신었는지 모를 정도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평화는 자연스러움으로 인간이 사는 거처 구석구석을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렀다가 그 시선이 완전히 정착되는 것을 일컫습니다. 신앙이 올바르게 작동되고 종교조차도 자신의 문제를 신자의 문제로 떠넘기지 않으려면, 평화라고 하는 신적인 것의 메커니즘이 잘 작동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는 종교의 무기, 혹은 도구는 “믿음”(faith)입니다. 어느 때는 믿음이 있다 없다, 라고 하는 판별기준이 애매모호합니다. 그런데도 믿음을 강조하는 게 종교의 현실입니다. 종교의 개별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마지막 신앙 덕목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다름아닌 '존재의 음미’입니다. 달리 ‘무한의 맛을 보는 것’이라고도 풀 수 있습니다. 횔덜린은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그때 되면 오만함도 스쳐 넘어가며 또한 미개함도 성스러운 곳으로 다가올 수 있나니 저 끝 멀리서 거칠게 손길 뻗으며 광란한다. 그러면 한 숙명 그것을 꿰뚫어 맞히리라. 그러나 감사는 주어진 것에 곧바로 따르지 않는 법이니 붙들기엔 싶은 음미 있어야 하리. 또한 우리에게 마치 그 증여하는 자 이미 오래전에 아궁이의 축복으로 산정과 대지에 불 댕김 아끼지 않는 듯하여라.” 믿음은 신앙적 오만을 거두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무지를 알고 성스러운 존재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삶의 감사의 근원에 대해서 깊게 음미하고 그 존재에 대해서 맛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삶을 선물로서 준 존재에 대해서 아궁이의 불꽃과 같은 고마운 존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이란 존재에 대해서 지속적인 음미와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지금 앉아 있고 먹고 있으며 예배드리고 있는 모든 일상의 근원적 밑동을 낱낱이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이라는 아궁이의 작은 불꽃이 전체를 불사르고 따스한 온기를 전하듯이, 그 불꽃의 힘으로 악마의 유혹과 입발림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작동하는 힘은 다른 데 있기보다는 바로 그와 같은 작은 불꽃의 인식 혹은 깨달음과 같은 믿음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종교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제도나 체제나 교리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형의 힘, 곧 성령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는 종교의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령은 횔덜린이 말한 인간을 향한 정신, 인간을 향한 드높은 자의 정신, 인간을 위한 세계정신입니다. 흐리멍덩하게 사는 신자는 자신의 신앙의 위기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드높은 자의 정신조차 깨닫지도 못하고 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살아있고 거룩한 정신과 절대정신이 꿈틀대는 신자에게는 신앙의 위기란 발생하지 않습니다. 구조와 조직이라는 종교적 사회 제도가 개별 신자의 신앙을 좀먹고 시들하게 만들더라도 드높은 세계의 정신과 절대정신을 늘 인식하는 신자는 자신의 종교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위대한 하나님의 정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드높은 정신은 항상 “말씀”(the Words)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말씀이 귓가에 스칠 때에 그 거룩한 바람 소리를 예사로이 듣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냥 소리가 아니라 거룩한 말씀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종교가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한 근본 원리는 “기도”(prayer)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는 신앙의 바탕입니다. 횔덜린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대를 불린 자 모두 그대들 불멸하는 자 모두 그대들 천국을 우리에게 말하며 우리의 거처에 모습을 보일 때까지 우리 인류 잠들어 눕지 않으리라. 가볍게 숨 쉬는 대기 벌써 너희에게 예고하며 소리 내는 계곡과 천후에 아직 울리는 대지 그들에게 말해준다, 그러나 희망은 뺨을 붉게 물들이고 집의 문 앞에는 어머니와 아들 앉아 평화를 바라본다.” 꾸준히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긴 호흡이든 짧은 호흡이든 들숨날숨을 할 때마다 기도하듯이,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듯이 하십시오. 호흡은 내 생명의 가장 기초이지만, 그 호흡을 기울이는 것조차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존재에 대한 예의입니다. 신앙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들에게 가장 참기 힘든 것 중에 하나가 호흡입니다. 정확하게는 호흡의 완급조절입니다. 호흡은 시간이나 속도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흡, 즉 기도는 빠른 속도전이 아니라 신앙적 흐름 속에 있는 느림입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응답하는 관계의 시간은 자본의 시간이나 속도의 시간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입에 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의 지배가 편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간절함과 절실함에서 비롯되는 호흡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숨 쉬는 것과 기도는 자연의 이치와 같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현대 종교의 기이한 작동 메커니즘은 평화로운 여유를 갖고 자신과 이웃, 그리고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의 호흡을 잘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평화로운 호흡의 단절입니다. 시토회 수사인 토머스 키팅(Thomas Keating)은 우리 자신의 욕구와 판단의 죽음을 호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앙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마음자세가 바로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건 간에 당신의 자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오직 깊은 신앙만이 표면상의 거절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깃들여 있는 사랑을 감지하고 거기에 완전히 몸을 내맡길 수 있다.” 그의 말이 오늘날의 신앙적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가 올바르게 작동하는 원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밑바탕에는 여하간 인내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비에 기대는 데 있다고 말입니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간신히 대학 두어 곳에서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며 먹고 사는 사람, 칸트와 후설에 입각한 해체구성적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 함석헌과 같은 아나키즘(해석학적 호불호가 엇갈리지만)적 인간의 자유와 에코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과 같은 자연의 해방을 염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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