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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함석헌과 존 라일 주교의 신학

by anarchopists 2019. 11.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1/18 02:21]에 발행한 글입니다.


1. 함석헌과 존 라일 주교의 신학



생각과 쉼이 있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없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듯이, 생각하는 주체인 인간이 생각 없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생각 따로 믿음 따로, 이성 따로 신앙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신앙을 갖는 것 자체가 생각을 깊이 있게 하고 모든 미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그것을 믿음의 체계로서 자신의 삶에 한 영역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은, 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하겠다는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단순히 믿어보겠다는 맹목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을 통해 좀 더 성숙한 존재가 되겠다는 발로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갈수록 사람들은 사유하기 싫어하고 어떤 매체나 수단에 종속되어 자신의 판단을 수동적으로 맡기고 편히 혹은 편리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비단 일반 대중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종교인)도 마찬가지다. 존 라일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은 모든 사목자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할 것은 누구보다도 젊은층들이 생각의 부족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John C. Ryle, 박영호 옮김, 선한 길, CLC, 2013, 80-81쪽)

이미 19세기 영국의 젊은이들도 생각 없음의 신앙 혹은 삶에서 사유가 빠진 실존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오늘날 사목자들은 (신앙적·종교적) 무사유를 경계하고 생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생각 있음, 생각함의 신앙으로 잡아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세계는 무사유의 현실로 치닫고 인간으로 하여금 사유하지 않도록 하는 여러 환경을 만들어서 판단이 흐린 동물로 전락시키고 있다. 신앙적 사유는 이러한 모든 무사유로부터의 해방, 무사유로 일관하도록 만드는 것으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하는 것임을 사목자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신앙의지를 사유의지와 철저하게 결합시켜서 개별적 신앙인의 무사유로 인해 자신의 삶의 자유와 생각함의 의지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성의 ‘쉼’, 무사유적인 삶을 살도록 만드는 체계를 타파하는 ‘틈’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라일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바쁜 가운데 살다가 바쁜 가운데 죽습니다... 그러나 바쁜 생활 때문에 멈추어 서서 영혼의 상태를 돌볼 시간을 잃고 맙니다... 모든 독자는 자기의 삶을 반성해 보기 바랍니다. 스페인 속담에 “서두름은 악마가 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충 기도하고 성경 읽고, 서둘러 교회가고, 급하게 형식적으로 교제 나누는 것을 삼가십시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고요한 가운데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값싸고 형식적인 그리스도교, 곧 주일 아침에나 성급하게 마음에 품었다가 그날 저녁에는 한 쪽으로 치워놓고 한 주일 내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교에 결코 만족하지 마십시오.”(John C. Ryle, 박영호 옮김, 선한 길, CLC, 2013, 82-83쪽, 228쪽)

파괴된 자기의식을 재생산하기 위한 틈새 시간을 꼭 어느 날로 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성스러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느냐 혹은 자신의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자신만의 시간을 그야말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존 라일은 서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너무 바쁘게 살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과연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시간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지하철이든지, 버스든지, 집에서든지, 식사시간이든지 간에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성의 자기실현이고 종교인에게 있어서는 성스러운 시간이다. 종교인은 서둘러서 미사, 예배, 법회 등에 참예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면서, 그 준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하면서 신과 만나고 있는 것이니 몸과 마음의 감각을 신에게 향하는 신앙 감성의 여유로움부터 길어야 한다. 마음과 몸의 성급함이 이성으로 하여금 천천히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조신해야 한다. 존 라일 주교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을 성스럽게 해야 할 것을 권고한다.

“영혼은 몸이나 정신만큼 안식일을 필요로 합니다. 영혼은 분주하고 바쁜 세상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영혼의 관심사는 끊임없이 시야 밖으로 벗어나기 쉽습니다. 이러한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영혼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날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조용히 성찰하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늘을 위해 순항하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고 입증하는 한 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안식일을 빼앗아 가면 신앙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이 없는 상태”로부터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가는 수순을 밟는 것이 일반적 원리입니다.”(John C. Ryle, 박영호 옮김, 바른 길, CLC, 2013, 394-395쪽)

평상시 욕망과 욕구대로만 살아가는 시간을 비우고 오로지 비움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타자를 위해서 마음을 쓸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 안식일(주일)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안식은 인간의 쉼이자 자연의 쉼이다. 인간이 쉬어야 기계가 쉬고, 기계가 쉬어야 자연이 쉴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쉬어야만 온 우주가 쉼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쉼은 만물의 쉼이고 그 쉼은 곧 마음 나눔이자 정신 나눔이며, 신이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다른 날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시간이다.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은 결국 자신의 내면에 있는 초월적 존재를 관조하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일 분주한 삶의 날, 노동하는 날과 구분이 되는 날이 없다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사유는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쉼을 의례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재생시키고 재현하는 것도 바로 망각의 동물인 인간이 구별된 시간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타자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면서 궁극적 존재인 초월자 앞에 머리를 숙이기 위해서이다.

노동자에 대해서 연민을 느껴야 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구도로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고용주는 고용자에 대해서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노동자는 자본가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 상품을 생산해내는 도구가 아니다. 노동자는 인격체이고 사유하는 동물이며 마땅히 자신이 생산하는 상품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삶을 조형하는 공동 운명의 존재이며 이 사회의 공동선을 실천해야 하는 동반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형제로, 가족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무지한 자본가들도 돈, 값싼 음식, 좋은 주택, 레크레이션, 의료시설 등으로 하층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잘못 된 것입니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공감, 더 많은 친절, 더 많은 형제애, 더 나은 대우를 원합니다. 진짜 가족인 ‘한 혈통’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한 혈통’으로 대접받는 것이며 그들에게 연민과 친절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연민과 친절이 무한한 힘을 지녔다고 믿습니다.”(John C. Ryle, 박영호 옮김, 선한 길, CLC, 2013, 108-109쪽)

자본가는 노동자가 원하는 것이 단층적인 수준의 욕구일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 그보다 그들이 가진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공감해줄 수 있는 자본가를 원한다. 자신들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노동자들이 피땀 흘린 덕분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가족애야 말로 경영자가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덕목이라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은 예술가나 다름이 없다. 세계를 인식하고 미래를 예견하면서 새로운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예술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의 순수한 구현이 바로 노동 현장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이해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계의 진보와 발전은 단지 권력과 자본, 그리고 지식을 독점한 소수 자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물질성으로 전환하는 노동자와 함께 할 때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존 라일이 가지고 있는 노동신학적 탁견이 엿보인다.
그 누구보다도 종교인으로서의 경영자는 노동자의 현실을 더 잘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적 관념에 토대를 둔 경영철학, 경영신학(종교적 경영마인드)은 세계의 물리적 현실이 지나치게 물질적 가치로 향하는 것을 방지해준다. 설령 경영의 이방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경영 마인드 혹은 삶의 철학은 종교적 신념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세상에 저항하고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사실입니다.”(John C. Ryle, 박영호 옮김, 선한 길, CLC, 2013, 152쪽) 이처럼 세계가 지향하는 바와는 다르게 혹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이 오히려 종교인의 모습이다. 과거 종교적 창시자의 삶은 당대의 관념과 사고, 그리고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러한 저항과 반항, 전복적 사고와 실천이 세계를 변혁시켰음을 상기할 때, 경영자이든 아니면 고용자이든 모두가 종교의 본래적 지향성, 즉 초월자의 마음과 초월자의 정신으로부터 태동된 삶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세계 저항적 종교의지, 세계 계몽적 종교적 외향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종교에는 세 가지의 신앙적 방편이 존재한다. 경전과 그리스도, 그리고 기도.

“성경과 같은 나침반, 그리스도와 같은 항해사는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오시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기도는 당신이 날마다 먹어야 하는 고기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의 황야를 안전하게 여행하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John C. Ryle, 박영호 옮김, 선한 길, CLC, 2013, 163쪽, 489-490쪽)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에서 지침이 될 만한 것 한두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 고전이 되었든, 저명한 철학서가 되었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종교인에게 있어서 경전만큼 종교 생활 자체를 이끌어 주는 중요한 책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존 라일은 “나침반”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인생의 좌표를 잃고 표류할 때에 내가 정말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것은 종교 경전이다. 수천 년 동안 현현들의 삶의 지혜가 켜켜이 쌓여 전승되어 내려온 경전은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동반자도 이와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생의 동반자는 잘 만나면 참된 삶의 가치를 조언해주고 좋은 판단을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 동반자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성현이요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라면 금상첨화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바로 그와 같은 존재이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업은 인생의 거친 바다를 잘 헤쳐 나가게 해주는 항해사나 다름이 없다. 거센 파도가 밀려오고 칠흑 같이 어두운 밤바다에도 나에 앞서서 바닷길을 잘 살피고 순항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개별적·공동체적 종교 행위인 기도이다. 초월자의 뜻에 순복하고 그분의 의지에 맞갖게 살아가는 것이 종교인 고유의 사명이라면 기도는 내 의지를 비우고 오로지 초월자의 의지를 벗 삼아 따라가겠다는 행동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서 복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다. 기도란 그리스도의 뜻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서 마음을 밝히는 행위이다. 사방에서 진리가 여기에 있노라고 외치더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고 참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식별할 수 있는 눈과 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기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기도는 초월자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고 참을 인식하는 유한한 인간의 필수 도구이다.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비우고 초월자로 가득한 상태로서 그분과 일치된 삶을 살고자 할 때 비로소 나의 거짓과 세상의 온갖 부정적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교회는 바로 그렇게 종교적 신앙 행위의 기준들을 통하여 세상의 모범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두세 명이 모인 것이 바로 교회이다”(Ubi tres ibi ecclesia)라는 옛 격언은 옳은 말입니다... 교회가 성경의 모범에 가깝게 도달하면 할수록 그 교회는 더 좋아지며, 교회가 성경의 모범에 멀어질수록 더욱더 나빠진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공리입니다.”(John C. Ryle, 박영호 옮김, 선한 길, CLC, 2013, 369쪽)

종교인은 경전을 삶의 전형(example)으로 삼아 종교인 스스로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인, 불교인, 유교인, 이슬람교인 등 대부분의 종교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경전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의 사종(師宗, 시조)은 죽어서 말이 없지만, 적어도 그분들의 가르침과 어록을 담은 경전은 종교 그 자체의 원본성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전은 살아 있는 초월자의 말씀이나 진배가 없지 않는가. 그 말씀이 지금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도록 만드는 것은 종교인 각자가 경전에 나온 진의대로 사는 것밖에 없다. 경전을 통달/통독하고, 달달 외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참된 것은 말-씀, 즉 말의 씀씀이, 말의 사용이 나의 행위와 일치되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이든 법당이든 살아 있는 실체로서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종교인들에 의한 종교 경전의 실천적 유용성을 통하여 도덕적인 선과 신의-살아-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을 명심불망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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