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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건강한 종교적 자아론: 그리스도교는 동무의 종교다!

by anarchopists 2019. 10. 3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4/0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건강한 종교적 자아론: 그리스도교는 동무의 종교다!



종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진술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객관적 혹은 객관주의라 함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많은 것이 상대적으로 보이더라도 절대적인 것, 그래서 입장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최소한 하나는 있다는 입장입니다. 모든 것이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각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코이노니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함석헌이 “기독신앙의 목적은 사귐에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0쪽)는 말을 반복 정리한 것입니다. 좀 더 심층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무의식과도 같은 신앙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의식의 표층보다 무의식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무의식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할 때는 정신병리적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종교의 심층을 잘 모르게 될 경우에는, 그것의 작용하는 힘, 본질적인 행위의 에너지가 억압되어 삶의 부조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종교의 집단무의식 혹은 개인의 무의식에는 사귐, 즉 코이노니아가 전제되어 있는데, 그것이 건강하고 건전하게 발현될 때에는 인간의 종교적 삶과 정신 또한 건강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 본연의 심층을 망각하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승을 한다거나 사회사상 혹은 자기 계발과 같은 에너지로 전락할 경우에는 그야말로 병리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종교가 그러한 병리를 병리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 무의식의 병리가 그것입니다.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라 한다. 기독교는 담담하기가 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기독교를 될수록 달고 진한 것으로 선전하려 애쓴다. 농촌진흥, 사회계량, 국가융흥, 문명진보, 인격수양, 실로 산함신감(酸醎辛甘)의 각종 맛을 탄 기독교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0쪽)


함석헌은 종교의 표층으로 나타난 무의식의 병리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그 휘두르는 기치가 찬란한 때에 있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아무것도 보잘것없는 때에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0쪽) ‘보잘것없다’는 말이 종교의 실패나 종교적 심층의 억압 혹은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 본래의 심층과의 화해를 말합니다. 어쩌면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승화(sublimation)가 맞을 것입니다. 종교가 ‘아무것도 보잘것없다.’는 자기 겸허적 발언은, 종교 무의식을 건강하게 내보이면서 종교 자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하는 자기 존재의 표현이자 종교적 자아의 인정과 수용일 것입니다. 종교가 낮아지고 비천한 데 처하려는 초자아적 행동은 종교가 고급화, 계급화, 권력화, 부자화(富者化)되려는 리비도를 잘 통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아나 리비도적 본능도 지나치면 오히려 병리가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종교적 자아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가부장적 아버지의 도덕적 감성을 내면화하여 자신의 무의식을 억압하면서 과도한 도덕 결벽증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칫 종교(인) 자신을 죄인으로, 죄인[범죄] 공동체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에게 있어 건전한 종교적 자아는 자신을 ‘벗’[友]으로 고백하고 발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타자를 벗으로 받아들이고 벗과 벗으로 만나 사귐이라는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벗이란 우(友)자는 본래 손 둘을 그린 것이다. 즉 손과 손을 마주 잡은 것이 사귐이다. 즉 악수다. 화해다. 사귐이란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의가 없어지고 호의가 성립되는 일이다. 벗이란 호의를 가지고 서로 대하는 사람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0-101쪽) 성숙한 종교적 자아는 타자를 경계하거나 적으로 여겨 불화를 조장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종교적 자아는 수용과 포용, 그리고 긍정이 있습니다. 완고한 항문성애적 성격으로 타자와 물질을 소유하려 한다거나 지나치게 자기 고집으로 인색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결국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적 자아는, “평화”, “동무”라는 인식입니다. 종교적 자아의 실현은 타자와의 평화의 악수를 나누는 동무가 되는 일입니다. 이제 종교적 자아는 자신의 무의식의 소리를 잘 경청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자의 무의식까지도 경청, 환대해 주어야 합니다. 종교적 자아가 편협할수록 자신의 무의식과의 화해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화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의식, 곧 종교적 의식(religious consciousness)은 시대의 의식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사귐이란 청천백일하에 평화의 대지 위에 서서 하는 악수다. 인격이 동일한 평면 위에 서는 일이다. 동무가 되는 일이다... 사귐이라는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말은 본래는 공유라 동참이라 제휴라 번역할 만한 말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1쪽) 함석헌의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자아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타자의 무의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타자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개방적 인격을 함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아는 상호인격적인 것으로서 서로 발언하고 참여하면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성숙도의 지표를 읽을 수 있습니다(J. Habermas, 이진우 옮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349쪽). 달리 말하면 종교적 자아는 인격성숙을 통해서 타자 그리고 사회와 통합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분열된 자아나 분열된 인격은 언젠가는 자기뿐만 아니라 사회에 병리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종교적 창시자와 인격적 일치뿐만 아니라 초월자에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무의식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포장된 방어기제로는 타자와 사귐이 있을 수 없고, 초월자와의 사귐도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종교적 자아가 가진 무의식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그 절대정신과 화해하여 올바른 자기인식을 갖는 게 급선무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4쪽).


억압하면 할수록 초월자의 뜻과 자기의 욕망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초월자에게 투사하게 됩니다. 초월자의 뜻을 자기화, 자기 내면화시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되레 초월자를 욕망의 근거로 삼고 초월자마저도 소유하려고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종교적 자아는 초월적 자아(초월자) 혹은 내면의 진정한 자기(Self)를 만나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종교적 자아이든 보편적 인간의 자아이든 자아는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분열된 자아와 상실된 자아, 불완전한 자아는 진정한 자기를 발견함으로써 완전한 자아가 되고 진정한 종교, 성숙한 종교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자아, 종교적 자아가 욕망의 덩어리[私我]로 뭉쳐 있음을 간파하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종교적 자아는 그것(es, 私我)을 넘어서 초월자와 만남으로써 온전한 인격의 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내면의 결핍을 극복하고 타자와의 온전한 사귐, 자아의 실현과 완성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5쪽).


함석헌은 사귐의 필연성을 역설하면서, “세계에 다른 데는 몰라도 적어도 조선에 필요한 종교는 코이노니아의 종교다... 종교는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는 우리 신앙이 있어야 할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6-107쪽)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자아는 단순히 국가나 사회 혹은 타자의 종교, 더 나아가 자신의 종교의 의미와 실체를 모방하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종교적 자아를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자아는 초월자 혹은 종교의 근본 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적 자아의 에너지, 종교적 자아의 리비도는 진리를 향해서 승화될 수 있고, 진리의 명법을 근본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의 명법이 말하는 것은, 종교적 자아는 반드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사귐’을 통해서 종교와 종교, 자아와 타자와의 인격적 통합성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순수성을 견지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자아와 대면하는 장 안에서 현재의 종교의 고통,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감소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아마도 순수하고 건강한 종교적 자아를 통해서 사귐이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사귐(koinonia)은 곧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라 공동(koinos)의 것, 공통적인 것, 공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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