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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어록 365일

편 갈라 죄인처럼 만들지 말자

by anarchopists 2019. 11.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2/23 06:45]에 발행한 글입니다.


편 갈라 죄인처럼 만들지 말자

[함석헌의 생각]
“죄는 다른 것 아니요 갈라짐이다. 부모와 자식이 갈라짐, 집과 집이 갈라짐, 계급과 계급,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갈라짐, 몸과 마음의 갈라짐, 사람과 하나님의 갈라짐이다. 갈라지면 어지럽고, 어지러우면 죽는다. 거기서 건지는 것은 다시 ‘하나됨’을 얻게 하는 것이다.
(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17쪽.

[우리들의 실천]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하는 종교 중 불교와 그리스도교 교리로 볼 때, 불교는 고(苦)로부터, 그리스도교는 죄(罪)로부터를 교리의 핵심으로 삼고 그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인간문제의 해결을 ‘고에서 해탈’로 보았고, 그리스도교는 ‘죄에서 해방’으로 보았다. 그래서 고의 업보를 어떻게 풀 것인가, 그 해답을 주고 간 사람이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의 길로 안내하고 간 사람이 예수와 그 제자들이다. 함석헌은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떠받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죄를 ‘갈라짐’으로 보았던 것 같다. 곧 그가 말하는 죄는 인간이 하느님과 갈라짐이다.(저작집 138쪽)

죄지음은 무엇일까.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심한 가운데 죄의식에 사로 잡혀 산다는 생각이 든다. 곧 상대방에 대하여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였을 때 흔히 “죄송(罪悚, 죽을죄를 지었다)”하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어떤 잘못도 안 했는데 과연 죽을 만큼의 죄일까. 말의 서두를 꺼내려 할 때도 “죄송합니다만”하고 말을 꺼낸다. 또 행동을 하려 할 때도 “죄송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세요”라고 한다. 자리 하나 비키는 게 죄가 될까. 이렇게 죄송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게 된 배경은 그리스도교의 보급과 크게 연관된다.

죄송이라는 말은 상대방(인간)에게 죄(잘못)를 지었기에, 또는 죄지을 정도로 송구(悚懼)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죄라는 용어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동서양이 모두가 처음에는 ‘하늘에 대한 인간의 잘못’을 죄의 개념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고대 전제왕권이 성립되면서 정치적으로 지배층권력이 피지배층인권을 속박(束縛)하는 법전용어, 곧 정치적 속박(束縛)으로 사용하면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전제왕권시절 제왕이 설정한 국법(國法:왕의 권력)을 어기는 것, 즉 왕의 권력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죄로 보았다. 그 후 왕의 권력을 제도화하면서 이것이 영(令)과 율(律)이 되고 합하여 법령(法令: 정치적 강제)이 된다. 바로 이 법령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하였다. 함석헌식으로 말하면 ‘국가(왕)의 의지’와 갈라지는 행위를 죄로 보았다. 서양의 시원을 이루는 로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죄는 왕의 뜻(로마법대전 Corpus Iuris Civilis)을 거스르는 것이 죄지음이었다. 그러다가 로마가 그리스도교와 결합하면서 정치적 속박으로써 죄의 개념은 다시 신을 거스르는, 곧 신과 갈라짐을 죄의 본질로 보게 되었다.(因人犯罪天主降罰, 그리스도교 《성경》 애가서 3: 31-51)

그러면 왜 함석헌은 죄를 갈라짐(분열分裂)으로 보았을까. 이에 대한 해석으로 종교학자 김대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른다는 것은 생명적인 것의 타자 혹은 절대 타자와의 능동적, 자발적 오만에서 비롯되는 인위적인 구획지음이다” 그리고 “갈라짐은 새로운-관계-지음이라는 필연적인 요청을 동반한다.”고 하였다.(김대식, 2013) 이에 따라 우리는 죄(갈라짐) 짓는 세상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관계(죄지음을 막는)를 시작하기 위해, 갈라짐을 없애려면 조화를 꾀해야 한다. 조화는 반드시 하나로 합해는 통일(통합統合)에서 온다. 민족의 아름다운 조화는 민족의 통일에서 온다. 한반도의 빼어난 금수강산의 조화는 영토의 통일에서 온다. 조화는 곧 평화다. 사회의 온갖 부문들이 조화를 하게 되면, 평화가 온다. 그래서 평화는 갈라짐을 막는 길이다, 갈라짐이 없으면 죄지음도 없다. 민족에 대한 죄지음을 막으려면 민족을 통일하면 된다. 지배권력들이 나라사람들에 대한 죄지음을 없애려면 나라사람들을 가라놓은 편 가르기를 없애면 된다. 내편, 제편을 갈라서는 안 된다. 내편은 애국자이고 제 편은 빨갱이(요즈음은 좌빨종북)이라고 갈음질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사회적 평화가 올 수 없다. 사회적 평화를 못 만들면 정치권력들은 나라사람들과 갈라지게 되고 권력이 나라사람과 갈라짐은 곧 나라와 나라사람에 대한 죄지음이다. 성직자들도 내 종교 제 종교를 가르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부르짖는 편 가르기를 해서는 안 된다. 편 가르기는 갈라짐이다. 갈라짐은 예수님에 대한 죄지음이다. 차별적 생각을 갖는 것은 죄지음이다. 사람을 편 가르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차별적 생각(가진 자와 없는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을 버리고 서로를 감싸 앉는다면 그것이 조화다. 조화는 곧 이념적 평화, 세계적 평화를 이루게 된다.


또 함석헌은 이 죄지음을 없애려면,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18쪽.) 이에 대한 해석으로 김대식은 “막힘은 분열의 원인이 된다. 나아가 불통은 너와 나로 갈라서게 한다.” “불통은 갈등이 증폭되어 불화하게 되고 반목을 가져온다.” 하나가 되면 불통도 갈등도 불화도 없어진다. 하나가 되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길 밖에 없다 “생각의 넓이나 깊이, 생각/함의 사유 방식과 행위는 서로 다를지라도 사랑 안에 녹아들면 그 지평을 공유할 있게 된다.” 따라서 권력은 나라사람들의 인권을 사랑하고, 국가폭력은 나라사람의 자유를 사랑하고, 토목건설은 자연을 사랑하고, 보수언론은 나라사람들 모두의 말과 글의 자유를 사랑하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한다면 갈라짐(죄지음)은 없다. 갈라짐이 없으면 조화가 온다. 조화가 오면 평화가 온다. 우리는 이를 실천했으면 좋겠다. (2014. 2,18. 새벽 황보윤식)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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