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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어록 365일

박정희에 대한 민중의 자각

by anarchopists 2019. 11. 1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4/2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민중의 깨달음

[함석헌 말씀]
민중으로서의 자기발견을 하자는 말이다. 한일조약이 나라를 그르치는 조약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왜 막지 못했나. 민중이 스스로 깨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정이 있고 이성이 있고 도덕이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는 반드시 역사적 민중으로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소에게 힘이 있되 자기의식이 없으면 그 힘이 도리어 저를 죽을 데로 이끌어간다. 소가 만일 제 코에 꿰인 것이 무엇이요 제 목에 걸린 줄이 무엇이요 제 뒤에 섰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았을진대 도살장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함석헌저작집 1, 한길사, 2009, 287쪽)

[오늘의 실천]
오늘은 함석헌이 말한 ‘민중의 자각’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박정희에 대하여 한국의 노인계층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어리석은 젊은이들이 추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그의 딸 박근혜까지 덩달아 좋아한다. 여기서 함석헌의 말을 되씹어보자. “소가 만일 제 코에 꿰인 것이 무엇이요 제 목에 걸린 줄이 무엇이요 제 뒤에 섯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았을진대 도살장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이다. 여기서 소는 우리 민중에 비유될 수 있다. 소에 걸린 ‘소코뚜레’와 ‘오랏줄’은 합법을 가장한 국가폭력이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독재자이다. 도살장은 인권과 정의 자유의 상실을 의미한다.

1960년대 초반, 기회주의자요 친일파인 박정희가 시민 학생이 주도한 4.19혁명을 수포로 돌리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권력이 탐이 나서다. 그는 끝내 군부독재를 이 나라에 만들었다. 4.19혁명으로 되찾으려 했던 나라공동체는 다시 국가폭력을 무기로 삼는 국가지상주의로 돌변했다. 박정희는 합법적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이 나라의 문명적인, 그리고 인간적이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미개하고 노예적인 것들로 바꾸어 놓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이 나라 민중의 주권을 강탈하고 일인독재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연장을 위하여, 국민투표라는 면피를 쓰고 헌법을 여러 차례 유린하였다. 그는 권력을 탐하는 비양심적인, 비윤리적인 사람이었다. 나라의 조직과 구조를 자신의 권력유지에 모두 맞추어 나갔다. 그 결과 이 나라 불쌍한 사람들로 하여금 “잘 살게 해주면, 그것은 독재가 아니다”라는 어리석은 노예적 발상을 하게 만들었다. “보릿고개를 없앴다”라는 유언비어로 이 나라의 경제부흥을 일으킨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잘못된 경제정책 탓으로, 이 나라에 형성된 수출위주형ㆍ금융특혜형ㆍ정경유착형 경제구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부조리·부패·비리 등 악순환의 한계성은 또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또 그의 자기중심적 경제정책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헤어나지 못하는 자본집중, 빈부심화, 저성장율, 실업률 중가, 귀족노동계급의 형성 등 비정상적인 사회구조와 비윤리적, 비도덕적, 비인간적 범죄구조가 꽈리처럼 형성되고 있는 이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구나 수출위주형 경제구조는 대외의존도가 너무 커서 신자유적 FTA체제 하에서는 큰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성장잠재력이 떨어지고 장기적 경제 불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모두 박정희식 경제정책이 만들어낸 오류이자, 폐해다. 이러한 박정희에 대한 민중의 자각이 없다면 그것은 끝내 불행하면서 불행을 모르는 민중, 행복이 무엇인지 영원히 모르는 민중,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영원히 모르는 민중으로 남게 된다. 그것은 노예제시대의 노예와 같은 인간으로 살다가 죽고 만다. 그런 민중은 영원히 로마의 저 위대한 스파르타쿠스(Spartacus; 기원전 80~70년대 인물)가 될 수 없다. 3.1운동도 없다. 4.19도 없다. 5.18도 없다. 6.10항쟁도 없다.(2012. 4.25, 취래원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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