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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팍팍한 2010년, 절망의 2011년

by anarchopists 2020. 1.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02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팍팍한 2010년,
그리고 절망의 2011년

이 나라는 세월이 가면서 더욱 ‘인간답게 사는 사회’가 못 되어가는 느낌이다. 지금 북유럽의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등지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듣거나 그들이 쓴 글을 읽으면, 그들 나라사람들은 우리에 비하면 천당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지옥은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곳이 있다면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모습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지옥의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옥불의 상황도 이 이상일 수는 없으리라는 느낌이다. 삶의 희망이 없는 나라. 정신적 고통이 가득한 나라. 심리적 구속으로 불안한 나라. 정서적 억압으로 문화가 뒤떨어지는 나라. 평등할 권리가 없는 나라. 사상의 자유가 없는 나라. 행복한 삶이 보장되지 않은 나라. 2010년을 보내며 떠오르는 느낌들이다. 2010년을 새삼 뒤돌아보니, 2010년 우리나라는 팍팍한 한 해였다는 생각뿐이다.

2008년 이후, 이 나라는 정치와 경제만이 삶의 전부가 된 느낌이다. 그래서 세상사의 가치도 인간보다 물질이 우선시 되었다. 그러다보니, 인간에 대한 판단도 내면적 가치보다는 외면적 가치에 비중을 더 두게 되었다. 교양과 성품, 인격 등 내면적 가치보다는 외형의 화려함으로 인간을 평가한다. 돈이 많은가, 돈을 잘 버는가, 돈을 많이 받는 회사에 다니는가. 국회의원인가. 검판사인가. 돈 잘 버는 정형외과 의사인가. 대학교교수인가. 유명한 사람인가. 그리고 영어를 잘 하는가. 이렇듯 교양적 성품보다는 명품, 일류, 최고만을 좋아한다. 그래서 화려한 연예인이 좋다. 돈을 많이 버는 유명 스포츠맨이 좋다. 영혼이 살찐 양질(良質)의 사람보다 자본의 노예가 된 병든 영혼, 곧 악질(惡質)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세상이 뒤바뀐 가치관 속에서 산다.
진보된 사회발전이 없다. 유교적ㆍ기독교적ㆍ반공적ㆍ폭력적ㆍ차별적ㆍ계급적ㆍ우월적 ‘낡은 우상’에 사로 잡혀 산다. 역사의 가치를 모르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탓으로 인간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평등적 가치보다는 불평등 가치를, 평균적 가치보다는 불균형 가치를, 자치적 가치보다는 통제된 가치를, 자연적 가치보다는 포크레인의 삽소리를 더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통일과 평화의 논리보다는 이념과 전쟁의 논리로 세상을 호도(糊塗)해 간다. 이게 다 사람보다는 돈이 먼저 된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거꾸로 돌아가고 있을까
. 아직도 정치와 경제를 우선시 하는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법칙을 보면 정치지도자의 경우, 강한 자(독재군주와 폭군)가 나오면 그 뒤에는 부드러운 자(위민군주와 현군)가 나온다. 그래서 세상은 중화되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정치현실은 이러한 역사법칙이 들어맞지 않는다. 통치술의 중화(中和)는커녕,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이승만이 민족을 말아먹은 악질이었다면, 박정희와 전두환은 민주주의와 인간의 자유를 유린한 악질이었다. 그래서 젊은 민중들은 부드러운 자들을 정치무대로 불러들였다. 이들에 의해 우리 사회는 잠시 과거를 반성하고 잘못을 바로 잡으려 애썼다. 그래서 잘못된 과거들이 제자리를 찾는 듯 했다. 그런데 낡은 우상과 박정희식 물질주의에 오염된 어리석은 늙은이들의 반란으로 양질이 구축되고 말았다. 그래서 미완성의 민족이 망가져가고, 인권과 자유도 유린되고, 게다가 자연까지 급살(急煞)맞는 도가니에 빠지고 있다. 인간을 속박하는 것은 인간끼리니 그렇다 치더라도, 자연까지 두들겨 부스니,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듯이 악질이 양질을 구축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희망 2011년’이라고들 한다. 이 말은 공염불(空念佛)이다. 이 땅에는 권력에 짓밟힌 ‘어둠의 자식’들만 고통 속에 살아갈 판이다. 권력자들에게 자유를 짓밟히고, 평화가 내동댕이쳐지고, 행복은 불살라지고, 희망은 강물에 몽땅 던져졌다. 미국에 대한 자발적 식민지화는 더욱 굳어져 가고만 있다. 그래서 피를 나눈 형제는 하루아침에 적이 되었다. 토목독재자의 돈벌이 때문에 죽은 애국지사가 4대강에서 오물을 뒤집어 쓴 채 되살아 피를 토한다. 시멘트로 멱살잡이 당한 4대강들이 숨이 막혀 죽어가는 데도 ‘친환경적’, ‘강 살리기’라고 공갈을 친다. 형제가 망하는 것이 곧 평화라는 언어도치(言語倒置)가 명제로 되었다.

세상윤리도 뒤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빈말과 헛말을 해도 “옳다” 하고, 이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면 “그르다”고 한다. 언론사도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서민들의 진솔한 사회비판적 ‘쓴 소리’보다는 대학교수나 정치인과 돈 잘 버는 이의 아유구용(阿諛苟容)적 ‘단 소리’를 더 반긴다. 조중동의 교수와 명사의 글에서보다 평범한 이의 글에서 사회진보적 글맛과 알짬이 더 나오는데도 말이다. 부자가 잘 살아야 가난한 자들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논리도 나왔다. 가난한 서민은 부자들의 알량한 은혜로 살아야 한다는 자본윤리가 판을 친다. 간난 아이들은 예방접종 없이 아프며 켜야 나라에 충성할 줄 안다는 새 보건윤리가 생겨났다. 어린가장은 굶어보아야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안다는 새로운 사회도덕이 생겼다. 도시서민과 농촌농민들은 강물에 던져지는 돈보다 못한 존재라는 시대용어가 생겨났다.

세상사(世上事)의 법칙도 바뀌었다. 대통령은 이제 공화국의 정치지도자가 아니다. 전제군주다. 국민은 인민(the people's)이 아니고 백성이다. 곧 국민이 백성이 될 때, 잘 살게 된다는 봉건적 법칙이 되살아났다. 전제군주의 새로운 통치이념도 생겼다. 검찰과 경찰의 사명은 국민의 권익보존에 있는 게 아니고, 전제군주의 지위보존에 있다. 공무원은 국민에 대한 봉사를 위해 있는 게 아니고, 군주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있다. 외세는 적이 아니고, 같은 동포가 적이다. 우리의 뿌리는 아메리카에 있다. 그래서 미국과 FTA(경제적 우호관계)를 해야 한다. 한우의 구제역은 광우병보다 더 무섭고 나쁜 병이다. 그래서 죽여매장(殺處分)해야 한다. 고기를 먹고 싶으면 미국우(米國牛)를 사먹으면 된다.

그래서 새해는 희망이 없다. 인간의 가치가 돈의 가치보다 못한 세상이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물속에 던져졌다. 시민의 삶에는 희망이 없다. 가난한 이는 죽어야 한다. 젊은이들은 일자리 희망이 없다. 금수강산은 대형 ‘철제 기계삽’에 의해 깡그리 뭉개지고 있다. 평화의 비둘기도 사라졌다 검은 독수리가 전쟁의 폭풍을 몰아오고 있다. 국민의 자유는 권력의 억압으로 공포에 사로 잡혀있다. 모든 말할 권리는 봉쇄되어 있다. 이제 언론은 부자신문들이 독식한다. 말하기가 무서워진다. 밥을 먹기도 두렵다. 물가는 오르고, 외국농축산물이 밥상을 점령할 판이다.

이런데도 ‘희망 2011년’인가. 전쟁을 통해 권력을 찾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진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자본과 권력의 앞잡이로 전락한 예배당에서 영혼의 안식은 찾을 수 있을까. 촛불도 밝힐 수 없는 이 나라에 민주가 어디 있으며, 평화가 어디 있는가. 부자감세 앞에서 가난한 이의 행복이 어디 있으며,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전제군주 앞에서 주민자치, 지역자치가 어디 있겠는가. ‘희망 2011년’, 이 땅에서 정말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1970년대 군인독재자의 파쇼에 의하여 인간 삶의 가치와 공동체 문화가 죄다 파괴되고, 서민들이 삶의 고달픔을 호소하고 있을 때 김지하가 노래한 <서울길>을 다시 떠올려본다.

간다/ 울지 마라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간다 /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간다

이 노래가 오늘의 이 사회에서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0. 12.31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 내용 중 4대강 홍보물은 <미디어 오늘.에서 떠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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