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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생각하는 민중이라야 산다.

by anarchopists 2020. 1.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12 06:34]에 발행한 글입니다.


생각하는 민중이라야 산다.
-능력주의에서 인격주의로 생각을 바꾸자-

한반도의 본격적인 서구화는 해방 이후로 보는 게 옳을 듯싶다. 이것을 전제로 볼 때, 우리 사회가 서구화된 세월은 6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사회와 문화를 오염시켜놓은 서구문화에 대하여 반성도 여과도 없이 아직도 서구사회로 마냥 달려가고만 있다. 과연 서구문화가 만능이고 동경의 가치가 있는지 한 번쯤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서구적 사상과 문화로 물들려진 한국의 식민지적 사회와 문화구조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생각하는 민중이라야 산다. -능력주의에서 인격주의로 생각을 바꾸자-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자본주의에 물든 능력위주의 정신구조를 고쳐야 한다고 본다. 근대 이후 유럽문명에 의한 세계화로 전 지구는 서구 중심의 문화가 전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존칭어가 없는 유럽인도어의 영향으로 자기 언어의 특성을 망각한 젊은이들이 비존칭어적 영어식으로 노인과 어른들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반말녀’라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이런 투로 서구문화는 우리의 고유한 언어특성까지 좀먹어 들어오고 있다. 한국어가 ‘인간존중의 언어’라는 인식을 못하고 불평등한 언어구조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비판적 서구문화 동경 심리에서 나오는 문화의 자발적 식민지적 근성에서 나오는 잘못된 짓거리다.

이뿐 아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능력주의와 경쟁주의에 의하여 아시아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연주의, 인간주의, 대동주의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곧, 정치ㆍ경제적으로는 서구의 국가주의에 바탕 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시금석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서구의 능력주의에 바탕 한 개인주의가 마치 평등과 자유로 위장되고 있다. 또 문화적으로는 서구의 합리주의에 바탕 한 과학주의가 만능적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인간의 삶에 결코 이상적 가치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임을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서구 등 미국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아온 선생들이 대학에서 교수를 하다 보니 무비판적, 비이성적으로 서구문화의 이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하에서 능력주의가 얼마나 공허한 논리인지 우리는 그 의미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는 경쟁주의를, 또 자본주의는 능력주의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그리고 경쟁주의와 능력주의는 평등주의를 위장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평등과 능력은 엘리트주의(elitism)의 핵심 명제이다. 법 앞의 평등, 선거의 평등, 능력에 의한 기회균등, 생명존엄성의 평등은 제한된 평등논리이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가진 이름자 엘리트족들이 자신들의 이익변호를 위한 변명일 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평등은, 결코 신체적 평등, 경제적 평등, 혈통적ㆍ인종적 평등, 지역적 평등, 문화적 평등 등 완전한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다원주의를 배제한다. 여기서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능력에 의한 기회균등의 허구성을 한 예로 들어보자.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자는 신체적으로 온전한 자와 애초부터 평등한 생존경쟁이 불가능하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을 대물림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자와 부유층에서 태어난 사람은 원천적으로 자본경쟁이 불가능하다. 도시에서 태어난 자와 시골에서 태어난 자 사이에는 본래부터 균등한 학력경쟁이 또한 불가능하다. 즉 한국사회(전 세계가 마찬가지지만)처럼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경쟁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사회구조 하에서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하다.(이 때문에 이명박이 주장하는 ‘공정사회 구현’은 애당초부터 허구다) 이것을 능력으로 미봉해서는 안 된다.

또 경쟁주의는 어떤가. 자본주의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능력주의에 입각한 차별적 경쟁논리가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쟁력에 입각한 능력주의가 인간이 살아가는데 바람직한 삶의 모습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뭇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 재주도 개인별로 특성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뭇사람들의 다양한 재주가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발전적으로 진화한다. 즉, 뭇사람들의 다양한 재질이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통일되어 갈 때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는 만들어진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시장경쟁력이 삶의 도구로 생활화되면서 ‘능력주의’가 삶의 기본수단인 것처럼 위장되었다. 그래서 자본에 입각한 능력이 결여되면 곧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엔 사회의 상대적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당연한 이치로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일등제일주의에 의한 권력쟁취와 자본축적 능력이 최고의 가치로 미화시킨 정치와 교육의 잘못이 크다.

권력과 자본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능력우선주의는 바람직한 인간이 사는 사회가 못 된다. 인간이 바람직하게 사는 사회는 인격을 갖춘, 인품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다. 이제 인격주의에 대하여 생각보자.

인격주의는, 남과 더불어 사는 정신이다.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생각이다. 남의 가치를 인정하는 마음이다.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는 사고다. 가진 것을 남과 나누어 가지는 자세이다. 즉, 공동선에 바탕 하여 공동체사회의 공공질서를 우선으로 하고 공공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의식이다. 이러한 사고, 정신, 마음, 의식을 갖는 인간을 인격적 인간이라 한다. 곧 인품을 지닌 자라고 한다. 따라서 자본과 두뇌의 능력보다 인격을 갖춘 교양 있는 인간이 존중되는 사회가 바로 참인간이 사는 사회다. 즉 ‘능력주의’보다 ‘인격주의’를, 그리고 그런 사회구조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다. 개인의 이익(형님예산, 4대강투자)을 위해 국가예산을 ‘날치기통과’나 시키는 사회는 사람이 사는 사회가 아니다. 예산의 날치기통과를 ‘밀어붙이기 능력’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집단은 사람다운(인격을 갖춘) 사람이 사는 집단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학교성적이 우수하지 못한 사람은 일부 특이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류인생(권력과 자본, 명예를 두루 갖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미래는, 학교성적이나 고시성적으로 인생을 결정짓는 능력주의가 아닌 인간적 권리, 사회적 정의, 평화적 사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능력주의에 기초한 ‘경제성장제일주의’ 사고를 깨고,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사회구조로 만들어 갈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2011.01.12.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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