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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탐욕의 공화국에서 촛불을 켜는 마음으로

by anarchopists 2019. 12. 2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6/04 05: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등록금이 왜 이리 올랐는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지만 그것은 절대액수로 본 것이고 실질 평균 국민소득으로 따져보면 첫째이다. 그 해답을 찾다보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와 모순이 노출된다. 자신의 내면까지 내려가 탐욕으로 얼룩진 부끄러운 자화상을 접하게 될 터이다. 공교육과 (사유화된) 사립학교, 즉 공과 사의 혼란과 도착, 명백한 모순이다. 공교육의 경우 사립이 사유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인이나 집단이 학원을 설립했더라도 법적으로는 공공재(公共財)가 된다지만 실질적으로 이사장과 족벌이 소유권을 행사한다. 대개 가족끼리 총장이나 이사장직을 순환시키면서 후손에게 대를 물린다.
  그 점에서는 개인소유가 아닌 사립학교는 약간 다르다. 대개 종단이나 교파 소속으로 족벌사립학원과는 운영 방식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재정조달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중등은 국민 세금에, 대학은) 등록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교주나 교단에게 전횡을 주는 사학법을 고쳐야 할 때 이들도 벌떼처럼 함께 단합하여 저항한다. 같은 기득권 온존세력이다. 그러나 종단 사립은 일차적인 개혁대상이 아니다. 개인 소유 족벌 기관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난 적립금은 당장 학교 예산으로 전환하고 등록금 감면으로 이어져야 한다.
교주가 있는 족벌 사학은 교육은 허울이고 명리추구가 학교설립의 동기이다. 교육에 기여하고 싶으면 기금을 기존 학교나 공동체에 맡기면 된다. 명예와 이윤(名利)추구는 교육주체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신성한 가치를 위장하여 권세를 탐하는 점에서 학교의 교주(校主)는 (유사)종교의 교주(敎主)와 다를 바 없다. 교주에게 교사나 교수들은 도구가 될 뿐이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보직, 승진 같은) 혜택을 받기위해서는 줄을 서야한다. 사실상 인사권도 쥐고 있어서, 재정권, 운영권까지 전횡하는 구조 속에서 부패가 만연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는 것은 다 알려져 있다. 왜 재벌, 대기업까지 대학을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는가, 이유는 너무 뻔하다. 이익을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교육자들이 교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현실이다. 진리를 말하고 사회정의나 양심의 자유를 이야기할 수 없다. (등록금 투쟁에서 한 사람이라도 발언한 교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회문제에 거의 다 침묵하고 있다. 탐욕의 화신이 탐욕을 순치시키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교육을 시켜야할 신성한 공교육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모순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모델인 미국의 경우에도 그러한 사례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남과 북의 두 정권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극악한 모델이 되어있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몰락하고 있다는 경고는 무근거한 주장이 아니다. 우리는 침몰하고 있는 천안함에 타고 있다. 천안함의 진실을 모르듯, 원인은커녕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모두 유물론자가 되어 물신(物神)의 마술에 마취, 최면당하고 있어서다. 영이 있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정치지도자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쥐나 곰 같은 동물 형상으로 보이는 것도 그 증거다. (신문 만평이 그걸 잘 반영한다. 웃고 있는 미국 부자 빌 게이츠의 얼굴과 대조해보라.) 중국 사람들이 개인의 태생을 12간지(干支) 동물로 형상화한 것은 옳았다.
  탐욕이 인간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은 석가모니가 아니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공리이다. 모든 종교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마다 있는 계명(誡命)들이 극서이다. 그런데 계명을 지키고 사는 신도가 얼마나 있는가. 각종 종교의 신자는 인구의 절반이 넘는다. (각 종단이 주장하는 숫자를 합치면 인구수를 초과한다.) 자기 종교의 계명에만 충실해도 이 사회가 이렇지는 않을 터이다. 믿는다고 더 착해지는 것 갖지 않다. 오히려 물질로 천당, 내세까지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다. 신과 진리를 교회(종교조직) 안에 가두어 놓으려 하는 격이다. 신학에서 구원은 교회 안에만, 아니면 밖에도 있다는 논쟁이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교회를 종교조직으로 확대한다면, 구원은 종교 밖에만 있다고 주장한다 해도 반증할 수 있을까. 종교의 선기능과 역기능을 따져서 가늠해본다면 그 주장이 옳지 않을까.
  그래서 함석헌 선생이 교회조직을 떠나있으면서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무교회주의를 거쳐 가장 덜 조직적이고 평화주의적인 퀘이커 모임에 몸담기도 했다. 무교회주의는 무종교주의로 확대할 수 있다. 종교를 떠날 때, 역설적으로, 가장 종교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개조와 사회변혁에 종교와 교육을 가장 중요한 근원으로 보고 무엇보다 두 가지의 개혁과 혁명을 평생 외쳤다. 함석헌은 평생 공인으로 살았다. (박명림교수가 어제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 지지적했듯이) 공과 사를 넘어서 철저히 공인으로 산 지성이었다. (노무현도 누구보다 가장 공인적인 대통령이었다.) 사회의 녹을 머고 산 지식인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쯤 되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공인임을 인식하고 선언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 현실에서 남아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결국 민주주의의 절차와 실천과정에서 개혁과 혁명을 이루는 수밖에 없다. 내년 총선과 연이은 대선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그것을 놓치면 민족사회로서 존립이 위태롭기 때문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이 통탄하였듯 이름만의 삼국통일로 고구려의 고토를 잃어버림으로서 이후 14 세기 동안 수난당한 것처럼, 그나마 더 놓치는 운명에 빠질 수도 있다. (잘못하면 북한의 붕괴과정에서 고구려처럼 북한 땅이 중국에 예속될지도 모른다. 막 출간된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는 그런 불안 심리의 표출로 보인다.) 국토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한 마음으로 통합된 민족으로서 나라로서 행세할 근거가 있겠는가. 남북, 동서로만 아니라, 계층적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지금도 과연 한 공동체, 한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의심이 드는 현실인데 말이다.
  현실적으로 남은 희망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들의 연대와 통합이 필수적이다. 우선 두 진보정당이 합의를 이루어가는 모습에 한 줄기 빛이 보인다. 집단이기주의는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어버리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 될 것이다. 과거 두 김씨처럼 탐욕을 부리는 정치인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양김의 고집으로 민주주의가 5년 이상 후퇴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것은 인간고통의 원흉인 탐욕의 발동이다. 또 하나의 희망은 등록금 반대 투쟁을 하는 촛불집회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은 노무현이 말한 “깨친 시민권력‘의 상징이다. 월드컵 응원할 때, 촛불을 켜고 시민의 권리를 주장할 때, 우리는 모처럼 행복했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이 시민의 편에서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시점에서, 교육과 조직종교까지 희망을 저버리는 지금, 촛불을 켜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이다. 내 마음에 켜는 유일한 희망이다. (김영호)

김영호 교수님은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다. 선생님의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에서 영향을 받은 다원주의다.

선생님은 늘 사회변혁을 갈망하였다. 하여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979)에 간여하였으며,『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낸 바 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부회장 학술위원장직을 거쳐 함석헌학회 학회장을 맡고 있다.(2011년 8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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