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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대학의 존재이유

by anarchopists 2019. 12. 2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6/02 05: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대학교육은 누구나에게 다 필요한가

  등록금 사태는 한국 대학과 나아가서 학교교육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덩어리의 한 외형적 단면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내면적인 문제까지 성찰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왜 누구나 대학을 다녀야하는지 하는 질문과 잇닿아있다. 대학은 1) 학술지식의 습득, 2) 사회지도자 훈련, 3) 시민이나 국민으로 섬기는 데 필요한 교양의 습득, 4) 인성과 인격의 도야, 5) 직업훈련 같은 고매한 목적을 갖는 사회기관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것을 일일이 따지고 들어오는 학생이나 그 부모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부모가 못 다 이룬 신분상승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나 또래와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압박(peer pressure)에서 할 수 없이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원시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준수한 통과의례(rites of passage) 정도일 뿐이다. 또 다른 통과의례인 결혼의 조건을 유리하게 갖추기 위한 준비도 된다.
  위에 열거한 대학교육의 다섯 가지 목적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 누구나 다 학술을 연마할 필요나 소양이나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석사, 박사학위만 있으면 존경을 받는다고 무리를 하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타이틀은 얻더라도 다른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야 한다. 학력과잉과 인력수급의 문제가 있다. 2) 누구나 사회지도자가 될 필요나 소양, 취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극히 일부만이 해당한다. 3) 교양의 습득은 필요하지만 대학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기노력으로 독서나 정보수집, 현장경험을 통해서 쌓을 수 있다. 4) 인성, 인격의 도야는 현재의 한국대학 교육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공부와 아르바이트, 취직 준비하느라 한가로이 인격을 닦을 여유도 없고 환경도 못 된다. 성적에도 반영되지 않는다. 이 분야는 학교교육에서 기대하더라도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에서 함께 이루어져야한다. 또한 교수들이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없다. 균형 잡힌 인격을 갖추었다고 평가할만한 교수는 희귀종이다. 지식을 보고 선발되지 덕성을 보고 선발되지는 않는다. 대강 재승박덕(才勝薄德)하다고 보면 된다. 남은 것은 5) 직업훈련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고등학교나 전문대학에서 할 수 있다. 대학에까지 와서 할 필요가 없다. 물론 고급 직업(의사, 변호사, 경영자, 교사, 약사 등) 교육은 (서구처럼) 전문대학원에서 받아야 한다. 학부과정은 이를 위한 폭넓은 기초를 쌓는 과정이다.
  지식과 정보의 습득보다 중요한 것은 합리적 가치관, 폭넓은 세계관, 올바른 종교관을 갖추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비판적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인문학(문학, 역사학, 철학, 심리학, 종교학, 인류학 등)을 무시한 좁은 전문 지식에만 한정된 커리큘럼으로서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기술자만 양성하는 기관, 취업준비 기관일 뿐이다. 이런 과정을 고졸의 80% 이상에게 강요하는 나라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서구 기준으로는 그 절반 정도는 입학 후에 탈락해야할 수준이다. 그런데도 무리하게 다 졸업을 시키는 것은 대학 재정이 줄기 때문이다. 5천만 이하의 인구에 200개 이상의 종합대학 난립은 자원낭비다. 사회적으로는 인력과 국력의 낭비, 생산력의 저하, 개인적으로는 시간과 인생의 낭비이다. 3분의 1로도 충분하다. 현재 등록금이 총 13조원이라면 연간 5조원 정도로도 등록금 없이 운영이 가능하다. 창조적인 인재가 양성될 수 있다. 5조원 정도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반값 등록금을 실행하기 위해서 2조 5천억 예산이 소요된다고 본다. 그 액수는, 이미 지적했듯이, 바로 쓸모없는 서해안-한강 뱃길 공사비에 해당한다.) 대학의 난립으로 눈만 높아져서 눈높이에 맞는 배우자 물색하느라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결혼이 점점 늦춰져 출산율도 낮아지고 있다. 무료 교육은 저 출산율 같은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
  대학을 올바른 궤도에 올리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혁이 급선무지만 근본적으로 부모의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풍토가 사라져야 한다. 자녀들이 건강하고 명랑하고 행복하게 산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어야 한다. 아이들을 부모의 족쇄에서 풀어줘야 한다. 잘못 되거나 자살한 아이들의 부모들은 그러지 못한 것을 아마 후회할 것이다.
  사회에 범죄가 점점 교묘해지고 날로 증가하고 있다. 양극화, 성적위주 교육, 청년실업, 도덕성 상실의 풍조의 결과이다. 배운 것이 많을수록 범죄의 스케일은 커진다. 엘리트 집단인 검찰과 그 출신들의 부도덕성과 부패는 극심하다. 오늘도 검사 출신 청와대 참모의 저축은행 비리 연관 사건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동시에 축구선수들의 승부조작 사건도 터졌다. 많이 공부한 엘리트 변호사나 공부보다 운동에만 전심해온 축구선수나 똑같다. 스케일이 다를 뿐이다. 정경유착으로 인한 은행사건은 고구마 줄기처럼 연루자들이 줄줄이 드러날 것이다. 대학 특히 일류대학 입학을 목표로 한 학교교육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나라를 이끌고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 다대수가 그런 엘리트들이다. 대학교육이 아무런 효력이나 선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학벌 중시는 국민 모두에게 심리적 상처(콤플렉스)를 남겨준다. 엘리트건 아니건 모두가 치유가 필요한 병자들이다. 그래서 차라리 선진국들처럼 대학도 평준화시키는 것이 백번 좋다. 대학의 서열화는 비인간적이고 비생산적이다. 교육에서부터 평등성이 확보되어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
  빙산의 일각처럼 들어난 것만 그렇지 안 드러난 비리는 또 얼마나 될까. 돈이 모든 비리와 존속 살인 등 범죄의 원인이다. 한 보험회사 여사원이 저지른 살인사건은 상상하기 힘든 극악한 유형이다. 윤리적 기준이나 원칙이 없이 표류하는 이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점점 불안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누가 책임이 있는가.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종교인, 교육자에게 가장 책임이 있다. 사회지도층이 역사에서 큰 책임을 안게 될 것이다.
  책임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혁명이 필요하다. 납부금, 등록금이 없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치 사업체처럼 소유, 전횡하는 주인이 있는 족벌 사립학교부터 공립화, 공공재화 시켜야 한다. 국가나 지역사회에 귀속시켜야 한다. 교육의 공공성은 국제적 상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주들이, 지금 사립 중고등 학교처럼, 개혁의 과실 즉 국민의 세금을 따먹는 결과가 될 것이다. 민주진보 정당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등록금 철폐를 포함한 교육제도의 완전한 공립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 진정한 사회개혁은 교육혁명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호)

김영호 교수님은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다. 선생님의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에서 영향을 받은 다원주의다.

선생님은 늘 사회변혁을 갈망하였다. 하여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979)에 간여하였으며,『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낸 바 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부회장 학술위원장직을 거쳐 함석헌학회 학회장을 맡고 있다.(2011년 8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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