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노르웨이 참사가 던져주는 화두

by anarchopists 2019. 12. 1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2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다문화주의와 다인종사회, 축복인가 저주인가
-노르웨이 참사가 던진 화두


노르웨이의 한 극우파 청년 남자가 일으킨 80-90명의 대부분 청소년들이 희생을 가져온 참사가 평화와 복지의 상징인 북 유럽 국가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세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사건을 계획한 동기는 중동(이슬람권) 이민자들과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비호한 진보정권(노동당)을 겨냥한 응징이라고 한다. 어느 사회건 좌건 우건 극단주의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극소수 미미한 수냐, 아니면 점차 늘어가는 부류냐이다. 이민자수가 인구의 10%를 넘어가고 있다는 보도가 맞다면, 노르웨이 주류사회에 통합, 적응해야할 이민자의 부적응 정도에 따라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이들에 대한 반감이 쌓여간다면 지금은 격리된 사건이랄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민정책은 점차 큰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모로 이상국가라 할 노르웨이, 나아가서 북유럽 국가들이 세계화 바람을 타고 어떤 여파를 맞게 되리라고 나는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것은 내가 겪은 한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느낀 것이다. 하나는 2001년 여름에 오슬로 대학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하러 공항에 내려서 날치기 당한 사건이다. 중동 출신으로 보이는 청년 셋이 양 손에 가방을 든 내게 교묘하게 접근하여 화장실까지 따라와 도와주는 척하다가 노트북이 든 가방을 갖고 달아난 일이다. 그 안에는 발표할 논문 자료와 비행기표, 구 여권 등이 들어있었다. 놀래서 공항 직원에게 신고했더니 중년 여직원이 재빨리 공항전철까지 달려갔다 오더니 벌써 내뺐다고 아쉬워하던 모습이 선하다. 당시 그런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고 미안해했다. 경찰을 불러 경위를 자세히 기록하게 하고 범인들이 잡혀서 당시에 값이 녹녹치 않은 노트북이라도 돌아올까 여러 해 기다렸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년 전에 박노자 교수를 만났더니 노트북 찾았냐고 궁금해했다.)


또 하나의 사건은 그보다 10여 년 전 핀란드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느라 스톡홀름에서 큰 여객선을 타고 가다가 배 안에서 한 남자에게서 ‘중국인은 가라’는 소리를 듣고 소란을 피운 일이다. 난 한국인이라고 항의하고 동양인 차별을 지탄하면서 그를 한참 애먹였던 기억이 있다. 이민문제와 인종차별 문제가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는 북구에서도 당시 고개를 들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지, 다수의 사고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번 사건처럼 소수의 소신(所信)이 폭력으로 표명되는 것이 문제이다.

이민과 차별은 세계화 속도에 맞추어 이제 전 지구적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그것을 해결하는 열쇠는 다(복합)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정책이다. 미국의 용광로(melting pot) 개념처럼 동화정책이 이상이지만 한계가 있음을 겪고 나서 도달한 원리이다. 이것은 일찍이 캐나다가 프랑스 계통 국민(퀘벡주)의 언어와 문화를 수용할 필요성에서 실행하고 다른 이민자들에게도 확대 적용하여 성공하고 있는 정책모델이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이민국가들도 채택할 수밖에 없다.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구 국가들이 이 정책을 적용했더라면 비극적인 국가분열을 초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국 같은 대국도 국가존속을 위하여 결국 가야할 길이다. 티베트 같은 소수 민족과 문화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국가가 지속할 가치가 있을까. 이 점에서 일본도 후진 사회이다.

다문화주의는 현대의 시대정신, 현대사회의 지배원리라 할 다원주의(pluralism)의 한 가지 표현으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와 상통하는 원리이다. 문화의 근간(根幹)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궂건 좋건 인도, 중국, 서양, 중동 문화의 밑바닥을 종교가 받쳐왔다. 노르웨이 사건도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에서 나왔다. 종교의 다름은 안고 살아야 할 현실이지만, 문제는 배타적인 근본주의자들 간의 다툼에서 온 것이다. 이번 사건이 유럽 국가들의 관용(tolerance) 정신이 무너지고 있음을 암시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한 북구나라들이 쉽게 보수화되기에는 축적된 지혜와 경험이 너무 단단한 것이라고 보고 싶다. 복지국가의 모델이라 하는 나라들이 이번 사건에서 노정된 것처럼 중대한 사회문제를 안고 있다거나 보수화된다고 한국 보수파가 오해해선 안 된다.

이 나라들은 작은 사건을 통해서 더 발전할 것이다. 노르웨이는 여러 가지로 아름다운 나라이다. 오슬로에서 서쪽으로 가는 기차는 여름에도 눈 덮인 산들과 폭포, 숨 막히도록 파란 피오르들을 지나 찬란한 항구도시 베르겐으로 태워다 준다. 그리그가 작곡한 페르귄트 조곡이 우리들 가슴에 아련히 울린다. 국토만이 아니고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고 아름답다. 한 청년으로 이미지가 달라질 수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나라만큼만 되어라.

북구의 한 사건이 우리에게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세계가 한 통속이거니와 한국사회도 이제 이민문제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해외 이민이 많아져서 선거권까지 주어질 정도로 블록을 형성할뿐더러 동남아에서 노동자와 이민이 유입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여서 다문화정책이 수립된 상태도 아니다. 이제부터 부딪쳐 가야할 과제이다. 노르웨이나 한국, 어느 사회이고 간에 순혈주의가 문제이다. 히틀러식의 인위적 순혈주의는 부당하고 불가능하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범인이 한국과 일본을 부러워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 인물 가운데 꼽았다니, 외국의 극단주의자에 비친 우리 모습이 바로 초라한 현실일 터이다. 남부끄러운 일이다. 그렇게 보일만큼 보수주의 가치에 눌려있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함석헌의 주장처럼, 종내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민족의 범주를 넓혀가면서 세계주의, 보편주의로 확대해가야 한다. 동시에 민족주의가 한국이나 어떤 나라나 거쳐가야 할 단계라면 민족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일단 분열이 아닌 통합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야 세계주의로 이행할 자격을 갖는다. 남북은커녕, 한국사회는 각종 파벌, 지역 등 분열주의로 가득 차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회가 2012년의 정치상황에 달려있다. 민주진보 세력이 어떻게 한 둥지를 틀어 가느냐에 달렸다(2011. 8.2, 김영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