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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비폭력의 철학과 정치미학

by anarchopists 2019. 10.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8/26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비폭력의 철학과 정치미학



비폭력의 철학은 함석헌에 의해서 처음 말해졌던 것은 아닙니다. 잘 알다시피 비폭력의 개념과 실천은 간디로부터 유래하여 함석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비폭력의 지시(체)(Bedeutung;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는 하나일 수 있으나 그 의미(Sinn; 대상의 지시 방식)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비폭력은 말 그대로 진리파지(眞理把持)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꼭 붙들어야 할 진리입니다. 그것 아니고는 혁명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세계와 정치를 바꾸는 진리 행동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34쪽). 비폭력은 단순한 정치 수사학이 아니라 정치의 근본 정신이자 혁명 정신의 극치입니다.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수사학적 형식들은 시대정신(Zeitgeist)이 되기를 갈망”(F. Moretti, 조형준 옮김, 공포의 변증법, 새물결, 2014, 429쪽)합니다. 함석헌의 정치 수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함석헌이 자신의 정치 수사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수사학이란 “상호 주체적 진리를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 체계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는 것이 목적”(F. Moretti, 위의 책, 397쪽)입니다. 함석헌의 정치 수사학은 비폭력의 철학적 가치 체계를 민중이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은 정치적 형식이자 동시에 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폭력의 정치 수사학은 시대정신, 시대가 요구하는 민중의 정신이요, 세계의 정신입니다. 비폭력의 정신은 바로 그러한 토대에서 민중을 평유(平癒)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비폭력이 아닌 “힘의 철학, 폭력의 정치”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죽이고 타자를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는 힘에 의지하는 철학은 상처와 술수와 치졸과 거짓만이 난무할 뿐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36쪽).


그러므로 정치, 국가(만일 그것이 존재 가능이라면-적어도 국가에 대한 회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민(民)이란 나라님의 자식 같은 사랑스러운 백성이 아니다. 노예나 다를 바 없이 죽지 않을 정도로 노동력을 쪽쪽 빨아먹는 대상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봉건 흡혈귀의 혈액은행이다... 모든 제후국의 지배자 계급은 주 왕실을 종가로 하는 친척이자 일가족이며, 나라가 바로 가문이고 왕의 가문이 바로 국(國)-가(家)인 구조다.”(이호영, 여자의 속사정, 남자의 겉치레, 책밭, 2014, 266-267쪽), 민중은 정신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정신은 스스로의 방안과 노선을 낳습니다.”(함석헌, 앞의 책, 36쪽)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바탕이 되어야 하며, 정신이 세계철학의 지향이 되어야 하고, 정신이 민중의 사유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비폭력은 이로써 정치 현실(추악함, 비도덕, 조잡함)과 정치이론을 조화시키고 민중이 신바람이 나는 정치미학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 존재(실존)와 정치적 현실 사이에 있는 간극을 좁히고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정치미학은 정치적 존재자들(정치적 행위자들)과 정치적 실존(민중)을 서로 편안하게 하는 비폭력으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권력은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 개개인의 권리를 위해서 사용되어질 때 폭력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것은 국가 체제, 정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 계층을 위한 권력으로 작용하게 될 때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민중은 그들에게 정치를 맡긴 적이 없습니다. 되레 그들 자신이 정치한답시고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민중이 묵인하고 인종(忍從)하고 굴종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무식이요 무성의요 무책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7쪽).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신, 곧 ‘혁명정신’을 일으켜야 합니다. 정신은 혁명적입니다. 혁명이
아니고서는 정신이 아닙니다.
민중의 정신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함석헌, 위의 책, 39쪽). 민중의 정신이 일어나야 세계가 삽니다. 민중의 정신이 광기에 사로잡히라는 말이 아닙니다. 망상에 사로잡히라는 말도 아닙니다. 민중의 정신은 세계를 고치는 이상을 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민중은 누구의 지도나 누구의 계몽도 없다면 전혀 깨어나지 못하는 무식자가 아닙니다. 정신과 의지(Wille)가 스스로 진보하고 사물이 사물이 되게 하고 세계가 세계가 되는 힘(A. Schopenhauer)이라면, 민중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각되거나 의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민중의 정신이 없거나 우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신, 의지는 그것이 그것이 되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지러운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새 도덕’이 필요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40쪽). 낡은 체제 속에서의 정신과 생각을 이끌었던 도덕은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도덕적 분투만이 사회를 구할 수 있습니다. 폐단, 구태, 차악, 안일, 안주, 절망, 자멸로 이끄는 도덕을 도덕이라 할 수 없으니 새로운 도덕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도덕마저도 정치적 행위자들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깨이지 못한 민중이 부화뇌동하여 자신의 사적 이익에 도덕이라는 훈장과 초자아를 부르짖는 현실에서 도덕의 갱신은 필연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도덕 영역에서 모범이 되는 인간을 ‘덕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덕’(德)을 독일어는 Tugend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유용하게 쓰인다’를 의미하는 taugen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덕이란 근본적으로 자연적 천성이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정과 본능적 삶을 적절하게 조정함으로써 비로소 덕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전재원, 로고스와 필로소피아,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 111쪽) 그래서 함석헌은 “낡은 체제에 속한 한, 너도 나도 다 악합니다.”라고 단언합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선은 특정인, 특정사상, 특정주의에 국한되기 마련입니다. 차별주의나 당파주의는 더 문제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40쪽). 정치적 무의식은 차별, 분리, 당파, 구별입니다. 통합하고 화해하고 치유할 줄 모릅니다. 정치적 무의식은 본능(id)과 현실적 자아(ego)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본능을 향해 치닫습니다. “이드와 현실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서 자아는 너무나도 자주 아첨꾼이자 기회주의자, 거짓말쟁이가 되려는 유혹에 넘어가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정치가가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위치를 대중들이 좋아하는 상태로 유지시키려는 행위와 비슷하다.”(S. Freud, 박찬부 옮김, ‘자아와 이드’, 쾌락 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153-154쪽 재인용, F. Moretti, 앞의 책, 448쪽) 프로이트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실존,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덕을 구상해야 합니다.


함석헌은 공산주의도 당파주의의 소산이요, 민주주의도 결국 다수결을 가장한 폭력이라고 비판합니다.
따라서 좌우도 아닌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윤리, 새로운 종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의 궁극은 비폭력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비폭력은 “너 나와의 대립을 초월한 것입니다. 차별상을 뛰어 넘은 것입니다.” 비폭력은 인격의 차별, 인축(人畜)의 차별도 없습니다. 오직 “생에 대한 절대의 존경을 그 도덕의 토대로 합니다.”(함석헌, 앞의 책, 40-41쪽) 정치는 이제 정치적 상투어를 파괴하고 정치의 상투적인 행위를 타파해야 합니다. 모든 삶의 바탕에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좌우진영논리, 좌우이념이 아닌 비폭력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비폭력은 자아를 존중하듯이 타자를 환대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생의 운동, 삶의 운동이라는 것을 통하여 외형의 형식과 가식을 뒤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정부는 정치적으로 희생된 목숨들의 안타까움과 진실을 외면하고 경제 부흥만을 부르짖습니다. 정치적 행위자들은 그저 형식과 가식, 체면, 가면만을 생각하고 민중을 짓밟으려고 합니다. 민중은 정신도 없고, 도덕도 없는 듯이 막 대합니다. 부흥도 민중 전체가 ‘감격’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감격시키지 않는 정치에는 쇼만 있을 뿐입니다. 감격은 앞에서 말한 타자에 대한 인식과 환대가 기초가 된 감정의 교환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것이 없습니다. 민중의 감격과 감정, 이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싸움, 파쟁, 당쟁만 일삼습니다. 심지어 민중의 정신과 목숨을 담보로 타협을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민중의 정신은 상승, 성장, 성숙할 수 없습니다. 진보는 바랄 수도 없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41-42쪽).


민중의 정신이 일어나야 혁명할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경제적 부흥이나 경제적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먹고 살만큼 사는 우리들입니다. 다만 극부와 극빈이 너무 심하니 그 둘을 조화롭게 하는 미학적 삶, 정치미학, 경제미학의 쾌감적 능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 전체가 일어나는 전체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민중 전체가 일어나야 합니다. 민중 전체의 정신은 “그동안 사회적인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면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고 결과적으로 최대 다수의 사람이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른바 롤스의 ‘최대극대화의 원칙’(전재원, 앞의 책, 147쪽)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은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며, 자기의 욕구를 포기하고 타자의 욕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민중의 삶의 충동, 삶의 의지를 위해서 정치는 고통과 악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욕망을 단념하고 삶 자체를 관조하고 기쁨을 얻도록 합니다. 대상과 현상은 욕망하도록 추동하지만 일시적이고 무상(허무)한 세계를 벗어나서 물자체, 즉 이데아 세계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정치의 목적, 정치적 비폭력은 인간 앞에 있는 것들이 우리를 기만하려고 하는 데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 욕망하는 자아를 정확하게 보고 욕망의 동기들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결국 우리의 의지는 동요시켰던 자아를 평온하게 하는 것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 뉴시스, 한국일보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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