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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종교의 정당성과 공존, 그리고 종교 너머에 있는 초월자

by anarchopists 2019. 11. 1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5/1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정당성과 공존, 그리고 종교 너머에 있는 초월자



  종교는 타자로부터 용인되어야만 하는가? 다시 말하면 종교는 자체의 정당성이나 자존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그 정체성을 부여받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와 다른 개별적 전통들을 연구할 수도 있으며 또 연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만이 우리의 해석은 한 가지 신앙의 통찰력과, 힘과 타당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신앙의 사실들도 정당하게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Wilfred Cantwell Smith, 길희성 옮김, 종교의 의미와 목적, 분도출판사, 1991, 28쪽)라고 말한다.


  종교를 연구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그 대상을 통하여 신앙의 통찰력을 배우기 위함이다. 더불어 자신의 신앙 이외의 다른 신앙을 어떻게 “정당하게” 평가하고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종교를 통하여 타자의 신앙의 통찰력, 즉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어떤 시각과 경험을 가질 수 있는가가 아니다. 신앙의 통찰력은 타자의 종교적 관념이나 경험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시각이 아니라 타자의 시각으로 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태도다. 흔히 타종교가 갖고 있는 신앙의 통찰력이든, 아니면 자기 자신의 종교를 통한 신앙의 통찰력이든 동일하게 자기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강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시선과 경험을 객관화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신앙의 통찰력과 깨달음은 타자의 시선으로 타자화시켜서 바라보아야 보다 엄격할 수 있고, 자신의 신앙 또한 풍요로워질 수가 있다.


  더 나아가서 타종교의 신앙의 사실들을 정당하게 다룬다는 것은 공정하게 보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편협된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도 똑같이 인정하겠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객관화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더군다나 타종교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종교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시선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 종교를 내 의지와 감정, 이성으로 인정하듯이 타종교에 대해서도 인정하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고 올바르게 다루려고 해야 한다. 이것은 이 세계에서 내 종교와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는 “열렬한 선교사라 할지라도 현대 세계에서는 그가 개종시키기를 바라는 타인의 신앙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공존이 인간의 다양성에 관한 최종 진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하나의 목전의 필요성이며 실로 필요한 미덕이 아닌가 한다.”(Wilfred Cantwell Smith, 길희성 옮김, 종교의 의미와 목적, 분도출판사, 1991, 33쪽) 어느 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입각하여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그러기에 앞서 타인의 신앙 존중과 이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것은 종교와 종교가 서로 공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특정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잠식하고 그 종교가 갖고 있는 문화를 바꾸고 심지어 말살하는 행위는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간 정신의 총체적 퇴보와도 같다. 각각의 종교가 갖고 있는 문화와 의식, 정신을 존중하게 될 때 인류 전체의 문화와 정신의 총합은 커질 수 있다. 함께-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우월하고 열등한 종교가 없이,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더불어 나란히 이웃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신앙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종교들은 무시되어도 좋다든지 혹은 모든 종교들은 본질적으로 같다든지 혹은 자신의 것 이외의 모든 종교들은 그릇된 종교라든지 하는 식의 진부한 전통적 대답들로써 이 문제를 파기하고 지나가 버리려 할 수 있다.”(Wilfred Cantwell Smith, 길희성 옮김, 종교의 의미와 목적, 분도출판사, 1991, 34쪽) 이 세계에서 종교가 의미가 있고, 인간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은 서로 다르면서 함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보완하고 보충해주는 종교는 자신의 것만을 주장하거나 다른 종교를 자신의 종교로 복속, 통합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의 다음의 말에서 보다 더 명확해진다.
“신앙은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배후에 혹은 그것 너머로 있는 어떤 것 혹은 어떤 분과 관여하고 있다.”(Wilfred Cantwell Smith, 길희성 옮김, 종교의 의미와 목적, 분도출판사, 1991, 36-37쪽) 각 종교마다 믿는 바 초월적 존재 혹은 신과 만난다는 것은 종교라는 울타리를 뛰어 넘는다. 초월자는 종교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월자는 이름 붙여 있는 종교라는 개념을 뛰어 넘는 존재다. 그러므로 나의 종교로 다른 종교를 폄하, 폄훼하려고 하지 않고 각각의 종교가 서로 자신들의 종교 너머에 있는 초월자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건강하고 건전한 종교라 할 것이다. 초월자는 종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뛰어넘은 세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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