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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강정마을 사태를 바라보며, 마음이 우주와 통하는 그날까지...

by anarchopists 2019. 11. 2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3/1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陽明學의 生態哲學的 讀解



1. 心-내향성과 외향성/ 본질과 운동
  수인은 良知가 인간의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물인 풀, 나무, 기와, 돌에도 있다고 보았다(人的良知, 就是草木瓦石的良知, 傳習錄. 下, 107). 또한 인간의 양지는 天理인데, 이 양지는 사물(事事物物)에 다하면 양지를 이룬다고 말한다(致良知/致吾心之其良知於事事物物也, 吾心之良知卽所謂天理也). 그러니까 양지는 인간의 마음 그 자체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양지가 발현되어 사물에 미치는 것도 양지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양지는 그런 의미에서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외향적 성질을 띠고 있다.

  心卽理라 함은 마음이 곧 이치라는 말인데 이는 마음이 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마음의 발동함이 지행합일이다. 마음의 움직임, 마음에서 일어남 자체가 이미 행동이고 앎의 시작이다. 생각과 마음이 움직임 그것이 행동 자체이다. 단순히 양지는 정적인 존재, 정적 본질이 아니라 행위이다(양지는 곧 변화하는 것(易)이다. 그(양지) 본래의 모습은 자주 옮기고 변동하여 머물러 있지 않고 온 사방에 두루 유행하여 위 아래로 항상 됨이 없고, 강하고 부드러움이 서로 뒤바뀌어 일정한 잣대를 찾을 수 없다. 오직 변화가 행해짐이 있을 뿐이다. 이 지(양지)를 어떻게 붙들어 낼 수 있을까? 《傳習錄》 下, 良知卽是易, 其爲道也屢遷, 變動不居, 周流六處, 上下無常, 剛柔相易, 不可爲典要, 惟變所適, 此知如何捉摸得).

  다시 말해서 앎과 지식이 발현하는 곳에 행이 있기 때문에 앎을 깨닫고 반성하며 끊임없이 심을 성찰할 수가 있다. 따라서 心이 理致가 될 수가 있고 心이 無慾이 될 수 있는 것은 생각과 마음의 정화 끊임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心은 외향성이라기보다는 내향성에 가깝다. 다만 心을 외향성이냐 아니면 내향성이냐 또는 내향성에 더 가깝다라는 표현도 心을 분석적으로 보려는 또 하나의 誤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心을 半善(중도적 선)으로 볼 수 있는가? 결론부터 내린다면 心은 無善無惡이다. 다만 心이 선으로서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려면 心을 관조하고 致良知行하는데, 수인은 그것을 自家體認한다고 말한다. 체인은 자기 경험적, 주관적 성격을 일컬음이다. 그것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공부와 수양을 통한 직관적 깨달음의 상태, 어쩌면 불교의 涅槃寂靜의 경지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본다면 心 자체는 악의 여지가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는다. 心은 거기 그대로 우리 안에 또는 만물 안에 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心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공부와 수양을 통한 자가체인이 있어야만 한다. 그 본성이 충분히 본질과 운동으로서 작용하고 인간의 삶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실제로 왕수인의 知行合一은 致知 과정의 전개이다. 致는 바로 行으로 볼 수 있는 바,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있는데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致知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지극한 데까지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지극한 데 이루기 위해서는 투박한 지(粗知)를 자각적인 지로 전화시키기 위해 실제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래서 습(習)에 물든 마음(惡)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도록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2. 同感, 同心의 倫理
  왕수인에 있어 사물의 리는 내 마음밖에 있지 않다. 내 마음 밖에서 사물의 리를 구하면 사물의 리는 없다고 말한다. 특히 이 마음은 하늘에서 얻은 것인데 이 마음의 본체인 良知를 物에 적용하면 理가 된다. 마음이 理를 따르게 되면 物로 실천되는 것이다(天物理不外吾心, 外吾心而求物理 無物理矣, 傳習錄. 中., 心也者, 吾所得于天之理也). 마음이 발현되는 것이 리이고, 리를 따르는 것이 마음이 머물러 물에 드러난다. 예컨대, 사람이나 자연 만물에게 베푸는 사랑의 실천은 하늘이 내게 주신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곧 양지는 보편적 도덕 원리로서 인간 개체의 특수한 삶과 생각을 통해 발현되어짐으로써 그것이 체인되어 인간이 마음 깊숙이 각인되는 양지(선을 추구하는 마음)가 된다. 이 양지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마음을 따르게 하는 힘이며 도덕적 행위의 실천력이다.

양지는 만물을 통일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同感의 倫理’, ‘同心의 倫理’를 작용케 한다. 마음과 사물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 하나가 아닌 내가 사물 안에, 사물이 내 안에 있어 어느 것이 나고, 어느 것이 사물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圓融[融化]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傳習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의 양지는 바로 풀과 나무 그리고 기와와 돌의 양지이다. 만약 풀과 나무 그리고 기와와 돌이 사람의 양지가 없으면 풀과 나무가 될 수 없다. 어째 풀과 나무 그리고 기와와 돌만이 그렇겠는가? 천지도 사람의 양지가 없으면 천지가 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만물은 인간의 양지가 존재하여 그 양지가 존재 가치를 부여할 때 의미를 갖는다. 만일 인간이 양지가 없으면 또는 양지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만물이 양지를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물이 인간의 양지에 따라 유무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만물은 인간의 양지 존재 유무에 따라 그대로 존재한다. 다만 인간의 양지가 만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데 의미부여를 하는 본체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양지가 만물의 양지가 되어 내가 만물 안에, 만물이 내 안에 있어서 서로 동질화를 느끼고 동화되려면 양지의 발현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양지가 발현되는 근거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是非之心’이다. 시비지심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알고 배우지 않더라고 능한 것’(是非之心, 不慮而知, 不學而能, 所謂良知也)이다. 좀 더 부연한다면 우리가 생명이 손상된 이들을 바라볼 때 가슴 아파하고 측은지심을 느끼고 마치 자식이나 부모친지가 아픔을 당한 것처럼 동감한다면 그것이 바로 양지이며 시비지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김세정의 기술은 양지의 의미를 잘 간파한 것이다.

“우주 생명의 중추로서의 인가만이 우주생명의 전모를 자각할 수 있는 영명성 즉 양지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영명한 마음인 양지를 전제로 해서만 우주생명의 부분으로서의 동식물 또는 무생물과 같은 여타 부분들의 생명 존재와 의미가 자각될 수 있다. 자각되어지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는 우주생명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신의 생명본질이 파악됨과 동시에 생명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물이나 무생물 나아가 우주는 인간의 양지가 없으면 생명의 전모가 자각적으로 파악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 가치 또한 부여받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비판의 여지는 있다. 양지를 전제로 해서만이, 또는 인간의 양지의 발현만이 만물을 만물답게 만든다면 양명학의 우주관과 생명관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양지가 발현되는 순간, 또는 인간의 마음을 통해 동감되는 만물은 그 자체로 존엄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草石瓦木의 모든 우주도 양지라 하지만 그 양지는 인간의 양지가 마음에서 발현되어야 양지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양명학의 주장에서 티끌을 발견한다면 만물은 인간을 떠나서는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로서의 생명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3. 나와 우주의 만남-仁과 靈明
  왕수인에게 있어서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仁이다. 그것은 만물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자각하는 감수성이다. 나와 우주와의 만남은 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주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죽음은 곧 나의 상처와 아픔과 죽음이다. 그것을 통해 만남은 단순히 우연적인 만남이 아니라 필연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수인은 양지를 靈明이라고도 말한다.

(氣의) 지극히 정미한 것은 인간이 되고, 지극히 영묘하고 지극히 밝은 것은 마음이 된다. ...이른바 마음이라는 것은 한 덩어리의 혈육으로 된 것이 아니다. 즉 그 지극히 영묘하고 지극히 밝은 것, 잘 행하고 잘 아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이른바 양지이다(其氣之... 至精而爲人, 至靈至明而爲心, ... 所謂心者, 非今一團血肉之其也, 及指其至靈至明能作能知, 此所謂良知也).

  영명은 총체적인 의미로서 인간의 앎과 생각, 지각과 감각, 인식과 사유와 같은 것을 말한다. 왕수인에게 있어서 영명은 “텅비었으되 신령스럽고 밝은 마음의 능력(虛靈不昧)과 신령스럽고 밝으며 분명히 아는 마음의 능력(靈昭明覺)이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영명은 양지로서 타자와 관계적이며 상호소통적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양지가 우주만물과 간격이나 분리, 구분됨이 없이 만물과 함께 존재하는 “상호관계적 존재성”, “공동존재성”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양명학의 양지는 특별히 인간의 양지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만물과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만물이 주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본체(마음)는 원래 안과 바깥이 없는 것(本體原無內外)이다. 그래서 나오 남, 안과 바깥을 일체히 함께 깨달아 버리는 것(人己內外, 一體俱透了)을 왕양명은 양지실현(致良知)의 궁극목표로 삼는다.”

4. 보편철학의 주제로서의 心과 大人을 지향하며 한 틀 어우러짐
  양명학의 心은 모든 철학의 가교적 개념이 될 수 있는가? 통약 가능한 언어가 되기 위해 그 타당성을 검증해야만 하겠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로 봐서는 心은 철학적 언어이자 종교적 언어의 근간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공통적 언어로서 보편적 언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心은 종교에서 말한다면 神, 최고선이요, 형이상학에서 말한다면 존재(esse), 현상학에서는 사태 그 자체(zu den Sache selbst), 윤리․도덕적 언표는 양심, 유가에서는 仁으로 말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우리는 왕수인의 생태철학적 교훈을 만년의 四句敎(네 가지 구절을 가르침)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중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은 양지이다”(知善知惡是良知)와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는 것은 격물이다”(爲善去惡是格物)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문제(생명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며 해결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단초를 마련해준다.
그것이 대인이 걸어가야 할 길임을 우리가 자각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성인을 지향해야겠지만 그 대인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어느 때에 우리가 왕수인과 같은 성인[인인, 대인]으로 살아 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끊임없는 공부와 수양을 통해 노력해야만 하는 과제를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성인으로서 만물과 일체가 되어 자연만물과 생명을 소홀히 여김이 없이 살아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소인이 아닌 대인이 되어 우주만물이 다 우리와 함께 하나의 생명(한틀)으로 어우러지는 그 날까지 우리의 공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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