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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종교의 기능, 선인가 악인가

by anarchopists 2020. 1.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0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기능: 선인가 악인가
- 토론토에서 벌어진 종교 논쟁

“(힛첸스는) 종교가 사람들을 ‘우리 인간이 병자로 창조되었으니까 강제로 치유되도록 만들어져야한다‘는 것을 믿도록 유도한다고 주장하고, ’이 과정을 감독하는 주체는 찬양을 요구하고 죄지은 자를 벌주는 천상적인 독재체제 -일종의 신성제국 북한(divine North Korea) 같은 체제- 이다‘고 말했다.“(토론토대학 신문 2010.12.2)

이 발언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힛첸스(Christopher Hitchens)는 영국출신 미국인 반-유신론(有神論)자(antitheist), 저술가로서 근래 독창적인 저술을 쏟아내고 있다. 『신이라는 망상』(The God Delusion의 저자인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와 더불어 무신론적 종교관을 펼치고 있다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의 저술에 『신은 위대하지 않다 - 어떻게 종교가 모든 것을 중독시켰는가』(god is not Great - How Religion Poisons Everything), 『신앙의 종말』이 있다. 이 저술들에서 그는 (조직)종교를 비판한다. “종교는 우리의 근원, 우리의 본성, 그리고 우주를 왜곡시킨다.” “신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만들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교리를 주입시켜 손상을 입힌다는 주장을 편다.

위 인용문은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한 연구소가 주최한 토론에서 전 영국수상 토니 블레어와 논쟁하면서 한 말이다. 이 날의 주제는 “종교는 세상에서 선(善) 기능을 하는 세력이다”로 의회에서처럼 찬반 토론을 거쳐 청중이 결의하는 형식이었다. 토론자로 두 사람이 나섰다. 두 사람 주장의 주지는 “신앙은 세계화에서 개화시키는 세력이 될 수 있다”(블레어)와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은 (양 떼 같은) ‘신자들 떼'라는 가엾은 이미지 속에 내포되어 있다.”
힛첸스는 이 제안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힛첸스에 의하면, 인간을 위한 치료는 구원을 약속받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비판적인 기능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것이다. 그는 종교의 역 기능으로 종교적 폭력과 위선을 들었다.

정치인 블레어가 대질자로 나선 것은 그가 영국 정계를 떠난 후 주요 세계종교들 간의 대화와 이해를 목적으로 [토니 블레어 신앙 재단]을 출범시킨 연유가 있어서이다. 수상 직을 사임하고(2007)나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가 친종교 편에 선 것은 당연하다. 그는 종교가 일부에 의한 ‘변태적 신앙’ 때문에 잔인하고 사악한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고 꼭 선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지만, 종교가 저질은 잘못은 종교의 전부가 아니고 선 기능이 역 기능을 훨씬 앞질렀다고 논증했다. 종교 무용론은 마치 히틀러와 스탈린 때문에 정치를 폐기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는 종교적 기반을 가진 구호 조직들, 국제 구호 단체들, 지역사회 조직들을 선 기능의 예로 들었다. 이러한 이타적 행위들은 사후에 징벌을 받는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신에 대한 사랑은 우리 이웃을 돌보는 것을 통해서 가장 잘 표현 된다는 신앙에서 실천된다고 말한다.

덧붙여서, 그는 모든 주요 종교들의 주요한 가르침을 보면, 모두 자비, 관용(仁), 남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를 남에게 베푸는 일(황금률)(유교에서 말하는 “스스로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에 해당) 등 비슷한 이상을 제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블레어는 종교를 일부러 내쳐서 다만 폭정과 고통을 가져올 뿐이었던 스탈린 통치하의 러시아, 폴 포트 통치하의 캄보디아의 역사적 사례를 가리켰다.

블레어의 빈곤퇴치를 위한 종교조직의 중요성에 대하여 응답하면서, 힛첸스는 빈곤퇴치를 위한 첫 단계는 종교가 오래 동안 막아온 여성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며, 종교와 관련이 없이 활동하고 있는 많은 구호단체들의 사례를 들고, 이들은 “이웃 중생들을 돕는 것에 즐거움을 느껴서” 봉사한다는 인본주의적 시각을 제시했다. 또한 황금률은 종교의 독점물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것은 공자의 『논어』에, 그리고 누구나의 가슴 속에도 있다고 했다.

사악한 행동들이 “종교의 이름으로”(블레어) 행해진 것이냐, 아니면 “종교와 그 경전들의 직접적인 결과”로 (힛첸스) 보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두 사람의 입장차가 뚜렷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하여, 한편으로는, 사랑과 생명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가르치는 종교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도 많은 죽음과 파괴의 원인 될 수 있는 것인가?”(켄 윌버)와 같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다.


이 토론을 둘러싸고 흥미로운 것 하나는 많은 청중의 참여였다. 2700석의 심포니 홀이 가득차서 큰 도서관에 스크린을 설치해야 되었는데 유료인데도 3천명 이상이 몰렸다. 강당에 들어가는 입장표가 암매로 500$까지 나갔다. 또한 BBC 방송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그래서 주제와 관심도에서 “대 논쟁”이라 할 만 했다. 마치 대승불교의 역사에서 옛날 인도와 티베트에서 벌어진 논쟁을 연상시킨다. 물론 두 유명 인사가 토론자였기도 했겠지만, 신자수가 급격히 주는 등 서구에서 기존의 조직종교의 구조가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종교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관심은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비슷한 시기에 토론토를 방문한 달라이 라마의 강연회에도 큰 체육관 좌석이 일찌감치 동났다고 한다. 동양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서양의 관심을 반영하는 이런 사건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또 한 가지 흥미거리는 토론의 반응과 효과이다. 토론 전 조사에서는 토론 주제에 대한 설문에서 22%가 종교의 선 기능 역할에 찬성, 56% 정도가 반대, 22% 정도가 수가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토론 후 조사에서는 68%가 ‘반유신론’ 입장을 찬성했다. 힛첸스 의 승리였다. 이날 힛첸스 쪽으로 기울어진 청중의 분위기가 확인 된 것이다. 어떻든 이 토론에서 확인 된 것은, 좋건 궂건 간에 종교의 힘이 앞으로도 금방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힛첸스가 북한를 악례로 비유한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다. 그 논평이 한 신문에서는 작은 제목으로 뽑혔다. 더구나 그 대목에서 청중들이 크게 웃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북미 신문들에 개제된 인기 있는 시사만화의 한 컷도 김정일 부자의 희화였다. 어느 날 신문에 개제된 큰 사진 하나는 예산안 통과시키면서 부린 한국국회의원들의 단상 폭력 장면이었다. 남북한 정권이 언제까지 우리를 이렇게 창피하게 할 것인가.

힛첸스의 주장은 함석헌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측면이 있다. 함석헌은 조직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인류와 사회의 진화에 누구보다 앞장 서야할 종교가 구조적, 교리적으로 낡아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서 조직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개인의 종교적 사고와 행동을 가두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제3의 종교개혁, 새 종교의 출현을 열망했다. 이 예언자가 반세기도 전(1959)에 “낡은 종교는 벗어서 역사의 박물관에 걸어라”고 외쳤지만 메아리도 들리지 않은 채 오늘의 상황은 더 어두워졌다. 힛첸스가 반대하는 것도 주로 이 조직종교의 해악이었다. 인간이 갖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종교에 대해서 습관과 관습을 벗어난 깊은 성찰이 요청된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켜준 논쟁이었다. (2011.1.3,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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