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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북한은 사랑의 대상이다.

by anarchopists 2020. 1.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03 07:20]에 발행한 글입니다.


사랑 - 햇빛의 연료

“아나스타샤에 의하면, 태양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해는, 지구에서 오는, 눈에는 안 보이는, 발산을 되비춘다. 이 발산(방사)은 사랑, 기쁨이나 어떤 다른 즐거운 느낌 상태에 들어있는 사람들에게서 온다. 태양을 벗어나 되비추면서 이 발산물은 햇빛 형태로 지구로 되돌아와 지구상의 모든 것에 생명을 준다. 그녀는 이를 뒷받침하는 논증을 한다. ‘만약 지구 및 다른 행성들이 태양이 주는 빛의 은총을 단지 소비만 한다면, 빛은 소멸되거나 한결같지 않게 연소할 것이고, 그 타오르는 불빛은 불균형하게 될 것이다. 우주 속에서는 불균형한 과정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적으로 상호 연관되어있다.’” (Anastasia 영어판 1권 167쪽)

믿거나 말거나,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태양이 지구사람들의 사랑과 밝은 감정의 발산을 되비춘다는 사실이? 우리가 보는,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그 태양빛이 우리의 사랑이 동력이 된다는 것은 아마 여태까지 듣지 못했던, 누구도 착상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Megre)는 각주에서 두 러시아 과학자(Lackhovsky, Gurdjieff))가 “태양은 차거운 검은 형체”이며 “비추지도 따듯하지도 않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인용한다. 우리가 배운 과학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소리다. 그러나 과학은 아직 발달의 끝에 와있지 않다. 설사 그것이 과학적이지 않고 시적으로 들리더라도, 그만큼 사랑의 우주적 차원과 위대성을 말해준다. 우리가 이웃, 뭇 생명, 지구를 더 사랑한 만큼 태양은 더 밝게 찬란하게 비출 것이다!

사랑은 한 종교나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다. 종교에서 실천의 핵심으로 제시된다. 우선 사랑은 우리말이다. 불교에서는 자비(compassion), 유교에서는 인(仁)(humanity, humaneness)이라 표현하지만 종교학자들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머리에서 나온 추상개념이 아니고 몸과 가슴에서 나온, 감성을 수반하는 구체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두뇌작용 즉 머리 굴리기는 번뇌를 일으킨다. 간절한 남녀 사랑에서도 사랑을 맛 볼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애정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해” 하는 말은 주체(나)와 대상(너)가 분리된 이분법적 구조이다. 참 사랑은 너와 나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유교의 ‘여아동근’(汝我同根), 천도교의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의 경지, 너는 ‘또 다른 나’(지브란), ‘나의 연장(延長)’(아바타 명상)임을 깨닫는 데서 체험된다. 그 과정에서 주체는 사라지고 대상(객체)만 남는다. 그 속에서 죽음의 공포도 사라진다. 불멸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나와 가족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동족, 인류까지 넘어선 우주적인 것이어야 한다. 마음을 점점 더 크게 열어갈 때 그 기분은 표현하기 힘들 만큼 달라진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바로 우리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마음을 활짝 열면 우주의 에너지가 내 속으로 들어온다. 그렇더라도 당장은 민족공동체가 사랑의 대상이 된다. 대통령이 청와대 파티에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인간적이다. 그러나 눈에 안 보이는 대상인 북한의 어린이들도 우리 어린이들이 아니라면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닌가.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대상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체험해본 적이 있는가, 다시 짚어봐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 번도 사랑해 본적이 없이 살다갈지도 모른다. 자기 사랑, 자식 사랑 말고. 이제는 인간을 넘어 자연, 만물을 사랑하자. (강물을 파헤치지 말자.) 인류의 사랑도 동포의 사랑이 출발점이다. 함석헌의 전체주의 사상의 시각에서, 이제는 사랑의 영역을 개인 대 개인을 넘어 개인 대 개인, 집단/공동체 대 집단으로 확대할 단계이다.

행복의 한 차원은 심리적, 상대적인 것이다. 점에서 먼저 북한동포에게 감사해야 한다. 상대적, 비교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이들에게 감사하고 그 대신 우리의 사랑을 보내주어야 주고받기가 된다. 사랑 없이는 통일도 불가능하다. 진정한 통일은 참다운 휴머니즘이나 종교의 실천차원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아니면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있어서, 오늘도 태양은 뜬다. 신년 정초에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였는가. 그것은 이기적인 나를 내려놓는 무아의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이 어떤 뜻을 지녀왔는지 알 수 있다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될 터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남의 나라 문자만 열심히 배워왔다. 한자에 열심이다가 요새는 영어에 푹 빠져있다. 사랑도 중국적 맥락(愛)과 서양문화의 맥락(love) 속에서만 이해해 온 셈이다. 언어의 혼란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알 턱이 없다. 어머니의 사랑 정도를 빼고는. 사랑이 그것 만일까?

사랑’의 어원을 찾아보면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생각”(思惟, 思量)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애(愛)를 가리킨다. 사랑이 남을 생각해주는 것 즉 배려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의미와 통한다. 함석헌이 강조하는 ‘생각’은 첫째 의미이지만, 둘째 뜻까지 함의한다고 보면 의미 영역이 철학에서 종교로 확대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단순히 생각(思)만이 아니라 사랑(愛)까지 하라는 뜻으로 확대할 수 있다. 참 생각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생각은 한자로 사애(思愛)라는 복합어가 된다.

사랑의 보편적 정의는 기독교성서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의 메시지도 그 키워드가 사랑이다. 기독교의 실질적인 건립자 바울이 내린 사랑의 정의는 상당히 세밀하다. (고린도 전서 13장). 그 내용에는 인내, 친절, 그리고 시기, 분노, 무례함, 이기심, 교만심 등이 없는 상태가 포함된다. 예수가 가리킨 의미는 “원수를 사랑하라”에 잘 담겨있다. 이웃 사랑은 신의 절대명령이다. 크리스천의 마지막 시험은 그 절대명령의 실천에 달려있다. 북한은 사랑의 대상이다. 더구나 동포인데도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있는 판이다. 원수 중에도 상원수라는 말이다. 구원을 따내기 위해서 얼마나 적합한 호재인가. 그것만 되면 천당은 따 놓은 당상일 터이다.

현 정권은 또한 근본주의 기독교 정권으로 평가된다. 출발 때부터 ‘고소영’ 정부였다. 아직까지 잘 들어맞고 있다. 그런데 왜 수구세력은 북한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기까지 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앞 두 정권에서 10년간 개발하여 정착시킨 대북 ‘햇볕 정책’을 완전히 깨뜨리고 만 것은 모순적이다. 신앙이 거짓임이 완전히 들어났다. 위선의 탈을 쓰고 있었음이 들어났다. 더구나, 소련 출신 아나스타샤가 말한 대로, 햇빛이 인간의 사랑에서 발산된 것이라면, 햇볕 정책이야말로 사랑의 실천이다. 북한은 신년사에서 남북관계의 복원을 말했다. 이쪽은 상식과 논리의 복원이 급선무다.

제주도 민요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너냥 나냥 두리둥실 너냥,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 참사랑은 너/나 없이, 밤/낮 없이 두리둥실, 두둥실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뭔가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노랫말이다.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 참사랑이다. (2011. 1.2,,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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