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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졸부 지도자들, 모두 들으시오

by anarchopists 2020. 1.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0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졸부와 박애-자본주의

이미 필요한 것을 다 가지고 있는데, 왜 돈을 또 씁니까?” (복권당첨자)

이 말은 최근 캐나다의 70대 시골(노바스코샤) 노 부부가 1,100 만 달러(약 130억원) 복권 당첨금을 비상예비비(2%)만 빼고 몽땅 사회에 기부하고 나서 기자에게 한 말이다. “당첨 전에도 돈이 많지 않았지만 당첨 후에도 많지 않았다.” 다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낡은 차와 집이 있지만 부족한 것이 없으니 그 돈의 용도가 따로 더 없다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바쁜 한국사회와 대조되는 풍경이다. 두 사회가 다른 것은 “이미 필요한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경우가 한국에는 적다고 할 수 있다. 양극화와 사회복지 면에서 캐나다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복권을 타면 대개 탕진하고 만다고 한다. 복권 당첨이나 횡재는 축복이 아닌 저주일 수 있다. 돈줄을 끝에서 악마가 잡고 있다는 것이 헛말이 아니다.

이 땅은 온당하고 건전한 부자보다 졸부들이 많은 나라이다. 이들이 기득권자가 되어 졸부 지도자를 내세우고 통치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의 극악한 전형이다. 근면성과 능력으로 하면 (골프선수와 음악가들을 보라) 유대인 못지않은 국민이, 건전한 자본주의가 작동되었다면, 지금 쯤 선진국에 진입했을 것인데, 2만 달러에 10 수년 째 턱걸이를 하다가 말다가 하고 있다.

국민소득이 문제가 아니다. 전반적인 삶의 질, 문화가 문제다. 영상매체는 유치한 저질의 오락과 폭력으로 얼룩져있다. 주류 언론은 그것대로 재벌화하여 기득권, 재벌, 특정 정당과 종교의 사수에만 열중하고 있다. 우리나라 재벌 같은 문어발식 재벌은 유럽 국가들, 일본, 미국에도 없는 기이한 기업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저술을 보지 않더라도 (스포츠까지) 국민의 생활과 의식 곳곳을 지배하는 거미줄 망이 되어있다. 가히 이 나라는 졸부 공화국, 재벌 공화국이다. 함석헌이 우리역사를 세계역사의 쓰레기통이라 했듯이, 남쪽은 자본주의의 쓰레기통, 북쪽은 또 공산주의의 쓰레기통이다.

함석헌은 돈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 했다.
함석헌은 집, 죽은 몸까지 오산학교에 남겼다. 그 집은 오산과 후손 사이를 오가면서 없어져 버렸다. 함석헌 사상의 산실이며 민주화 투쟁의 온상이요 지표였던 장소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돈의 위력이 그리 컸던 것이다. 재벌의 마수가 그가 남기고 간 『씨알의 소리』에도 뻗힌 증거가 있다.


아무리 개인주의적인 사회라도 혼자만 (잘) 살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개인주의 가치관에 바탕을 두었다고 하는 서양 사회가 오히려 제도적으로 시회복지를 강조하는 것은 얼듯 모순되게 들릴지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자기만 홀로 잘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자들(빌 게이트, 워렌 버핏 등)과 지도자들(클린턴 등)은 박애-자본주의(philanthropy-capitalism)를 내세우고 실천하고 있다. 앞에 말한 캐나다의 시골 노부부도 그 무언의 실천자인 셈이다.

그런데 두레정신이 지배한 민중의 삶과는 거리가 먼 민족공동체의 문제는 함석헌이 같이살기 운동을 제창한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오히려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서양보다 오히려 더 정신이 결여된 메마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개인주의건 사회주의건,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모든 이념은 원래 인간사회를 위하자는 순수한 동기와 취지에서 출발한 것이다. 다만 개인이나 소수 기득권 집단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하는 결과로 귀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 들어났다. 어느 것이나 본래의 뜻과 목적에 충실하면 궁극에는 같은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체제를 통해서라도 결국 사회복지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사회 안전을 담보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결점이 많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없다. 싫건 좋건 앞으로도 오래 인간사회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제 소비자가 된 사람들은 단 맛을 본 이상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아이들과 같다. 중국을 보라, 오랜만에 돈 맛을 본 중국 사람들이 이제 돈병에 걸려있다. 제주도까지 세계를 훑고 다닌다. (캐나다 대도시의 집값 까지 올려놓은 주범이다.

박애니, 사회 환원이니 하는 말은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환원이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불가의 말을 빌어, 사회 회향이라 하자. ‘자기가 닦거나 이룬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또는 부처님, 하나님에게) 돌린다’는 좋은 뜻을 지닌 말이다. 상생 정신과 더불어 회향 정신이 발휘되는 (자본주의)사회라야 생존할 수 있다.

어느 사회에서보다 드센 이기주의, 가족중심주의, 혈통주의 앞에서 박애, 청지기, 보시, 상생, 두레 정신 등 도덕적, 종교적 규범이나 원리들이 사회 현장에서 모두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바로 최근에는 우리나라 대표 기업이라 할 전자회사의 사장으로 재벌 3세대 젊은 아들이 임명되었다. 대물림은 사립학교, 종교조직에까지 침투했다. 체면도 수치심(羞惡之心)도 잊혀진 덕성이 되었다. 게다가 수구기득권층을 앵무새처럼 대변만 하는 지도자를 두고 있다. (오죽 했으면 한 야당의원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막말을 했을까.) 언제까지고 반면교사 모델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돈의 마수에 걸린 사람들과 집단, 사회에 이제 자발적인 도덕성 발현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로 보인다. 남은 것은 법적인 규제 장치를 마련하고 집행하는 수밖에 없다. 부자 감세 정책을 펴고 있는 현 정권하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면, 단기적으로는 정권교체를 기다리면서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 그 큰 테두리는 북구에서 실험해온, 그리고 리영희 선생도 선호한, 사회민주주의가 될지도 모른다. 근본적, 장기적으로는 새 인간, 새 공동체의 출현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몫을 찾아야 한다.
우리 조상은 원래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말 타던 기마민족이었다. 기상이 광활하고 막힌 데가 없었다. 얼마나 넓었는지 먼 후손이지만 진묵대사(1562-1633)의 게송을 읽어보면 짐작이 갈 수 있다. 무상한 물질에 탐착하지 않은 마음을 읽을 수 있으리라.

하늘을 이불로, 땅을 침대로, 산을 베개로 삼고 (天衾地席山爲枕)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 바다는 내 술통이로다 (月燭雲屛海樽)
대취하여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大醉居然仍起舞)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저어하노라 (却嫌長袖掛崑崙)

이 얼마나 장대한 대장부의 기개와 금도(襟度)인가. 남이 장군의 포부를 연상시킨다. 그렇던 민족의 기개와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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