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2/1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까지도 부정되어야...
“종교는 사람 살림의 밑둥이요 끝이므로 이것이 문제 중에도 가장 긴한 문제다... 종교란 곧 변하지 않는 자를 찾는 일인데, 무상(無常)에 못 견디는 인생이 항상적(恒常的)인 것을 찾는 것이 곧 종교인데... 모든 종교가 다 이때껏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절대미를 주장하려고 애걸해보았다. 자기만은 영원의 여왕으로 두어 달라 했다. 하나님을 이 장막 속에 모시고 독점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종교까지도 부정되어야 종교다.”(함석헌저작집14, 새 시대의 종교, 16-19)
종교(宗敎)는 동양 문화권에서 최고 혹은 으뜸(宗)이 되는 가르침(敎)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높은 가르침이요, 최고의 가르침, 나아가 거룩한(마루) 가르침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 문화권에서는 어떤가? 영어의 religion은 라틴어의 relegere(다시 읽는다), 혹은 religare(다시 묶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고등종교가 갖고 있는 특징인 경전이나 교리적 체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relegere라는 어원은 종교가 믿음의 내용으로 삼고 있는 카논(canon)을 과거에 씌어진 문자적이고 자구적인 의미의 고정된 언어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오래 전에 기록된 문서는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나 의미 체계로 재해석해서 말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경전은 항상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religare는 모든 종교 사회에서 다 통용되는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 중심적이고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사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religare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본래의 목적에 반하여 인간이 신의 뜻을 거역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구약성서의 창조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religare는 타락한 인간과 신을 ‘다시 잇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창조신화나 타락신화가 없는 종교 세계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외연을 확장시켜 보면 종교, 즉 religare란 신과 인간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측면이 있는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주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각 종교에서 말하는 신념대로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과 인간이 서로 돕고 이해하면서 연대하는 삶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면 종교를 갖고 있다 혹은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깨달음대로 산다는 것이다. 원래 깨달음을 뜻하는 각(覺)은 깨우침, 완전한 인식(episteme, 억견이라는 뜻의 daxa가 아님), 눈이 떠짐을 말한다. 눈이 떠진다는 것은 각 종교의 믿은 바의 신 혹은 성현의 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눈으로, 불교인은 부처의 눈으로, 무슬림은 알라의 눈으로, 유교인은 공자의 눈으로... 覺(각)은 원래 學(배울학)과 見(볼견)으로 이루어진 한자어다. 이는 배워서 터득함, 깨달음, 밝히 알기 위해 배움 등을 가리킨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가진 정보를 통해서 인식하는 종교, 세계, 인간, 사물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無明]을 벗겨내는 것이다. 불교의 창시자를 부처라고 하는데, 부처(buddha)의 원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니었는가. 그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깨닫기 이전과 이후의 삶은 확연하게 다르기 마련이듯이, “붇다”란 깨달아 다른 삶을 사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종교는 결국 자기와 세계, 그리고 삶의 이치를 깨달아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탐욕이나 집착 없이 살아감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고 하는 “나”, 자기를 사랑하고 자식을 교육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 살아가고 직장생활을 해서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그 “나”(self)라는 존재가 있는가? 없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나라는 존재는 계기적인 현상일 뿐이고 집착하고 있는 욕망 덩어리만 있을 뿐이지 나라는 실체는 없다. 이것을 고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상(無常, anicca/asassata)을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 보는 행위와 그 결과 나타나는 지각은 있지만, 보는 자로서의 자아는 없다(공/무아). 이것을 득하면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이해, 즉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 바른 생각, 제 나름의 생각,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 모두 깨달음이다.
따라서 종교는 다름의 현존이다. 종교는 다름을 사는 것이다. 온갖 인간의 망상과 허상을 깨부수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고, 예수의 눈으로 보면 예수로 보이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으로 보이고, 알라의 눈으로 보면 알라로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인의 참된 삶의 모습이요 태도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종교는 다름의 현존이다. 종교는 다름을 사는 것이다. 온갖 인간의 망상과 허상을 깨부수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고, 예수의 눈으로 보면 예수로 보이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으로 보이고, 알라의 눈으로 보면 알라로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인의 참된 삶의 모습이요 태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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