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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우리, 정말 스마트해졌을까?

by anarchopists 2019. 11. 2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1/15 02: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스티브 잡스 효과? 그의 공과를 묻는다!



‘정말’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의 컴퓨터 진화-‘혁명’이 아니라 ‘진
화’일 뿐이다-와 핸드폰의 혁신이 인간의 진보를 낳은 것일까?
한 사람의 업적을 평가할 때는 공과(功過)나 심하게는 공죄(功罪)를 균형 있게 살펴야 한다. 역사 속의 한 인간은 반드시 훌륭한 일만 했다고 도, 그렇다고 잘잘못만 했다고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이 과보다 크다면 그 사람이 인류사에 남긴 족적에 대해 추존(推尊)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과가 공보다 크다면 그 사람의 업적이 인류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칸트(I. Kant)는 “의지가 수동적으로 강제될 수 있을 때에는 동물적 의지(arbitrium brutum)이다. 인간의 의지는 감성적 의지(arbitrium sensitivum)이지만, 동물적이 아니라 자유(liberum)이다”(KrV., B 561-562)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볼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스티브 잡스의 공은 리얼리티(reality)를 버추얼(virtual)과 일치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과는 인간의 몸과 생각을 수동적이면서 기계와 일치(화해)될 수 없는 낯선 존재자로 남아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발전을 ‘편리’(便利)라고 말할 때, ‘편리’는 ‘더러움’과 ‘날카로움’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익숙하다, 친숙하다, 습관적이다, 몰두한다, 몰입한다, 예쁘다, 멋있다, 스마트하다 등등을 나타내는 술어
가 스티브 잡스의 상품과 나와 일체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편의적․도구적인 존재가 ‘영원히’ 나의 것, 혹은 관계의 상호주관적 매체란 말은 분명히 아니다. 언젠가 새로운 기억장치나 소통의 매체로서 인식의 주체를 교환해주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 속에 세계가 있는 것이다. 단순히 메모리 칩, 정보의 속도를 의미하는 소통 수단을 혁명이라 한다면 삶의 여러 곳에서 침묵할 권리, 눈을 감을 권리, 손에 펜이나 종이책을 잡을 권리, 차창 밖을 응시할 권리, 타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권리 등을 빼앗긴 인간의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망상이 이성과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현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 Foucault)의 논리를 빌리자면, 인간은 광기를 가두는 대신 이 시대의 미친 욕망을 향한 이성은 이전 보다 더 통제할 수 없는 도착적 광기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미셸 푸코의 철학적 사유와 맞닿아 있는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생각을 들어보자.

“이 나라는 휴대전화(편하게 ‘핸드폰’으로 불린다)가 철두철미하게 개인의 몸짓이나 행동
을 재주조하는 곳이다. 이곳에 살면서 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욱 추상적인 것으로 만든 이 장치에게 참을 수 없는 증
오를 품게 됐다. 어떻게 하면 핸드폰을 부수거나 정지시킬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자들을 숙청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처벌․감금할 수 있을지 수차례 생각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고 놀랐던 적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비판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체와 행위를 혁명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식의 진보는 더딘 반면에
과학과 기술의 진보만이 혁명이라고 말하는 그 배경에는 경제적 가치를 낳은 한 사람의 놀라운 아이디어와 경영전략으로 인해서 자본시장의 극대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스티브 잡스에게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 않다. 천재란, 칸트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을 자신의 작품에 규칙으로 부여하는 사람인데, 그것은 정신과 감성, 그리고 인식의 능력들[구상력(Einbildungskraft)과 오성(Verstand)]을 발휘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자 찬사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사를 창립하고 컴퓨터와 핸드폰의 놀라운 진화를 가지고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다시 한 번 그것이 인류사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과 정신의 계몽에 긍정적 기여 인가 아니면 그보다 못한 부정적인 기여 인가를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가 만든 컴퓨터는 진화의 진화를 거듭하면서 버전이 다른 컴퓨터의 모습을 띨수록 과거에 생산된 노후화된 제품들은 쓸모가 없으니 쓰레기로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핸드폰 역시 마찬가지 과정을 겪는다. 물론 스티브 잡스가 생산한 전자제품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가 기획하고 생산한 전자 제품 이외에도 세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자 제품을 만들고 그만큼 정말 골치 아픈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기획하고 생산하는 모든 제품 뒤에 지구촌 전체를 생각하는 환경, 교육, 인간, 이성, 관계, 소
외 등을 고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신학자 한스 큉이 말한 것처럼, “세계 내에 무엇보다 인간이 실재다......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이룩했지만, 동시에 전대미문의 환경파괴, 인구폭발, 물 부족, 에이즈 등에도 책임을 져야 할 존재가 인간이다. 흔히 과학자나 기술자들은 바로 그러한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발견․발명하고, 생산해내는 것들이 향후 어떠한 윤리적인 결과들을 초래할 것인가를 가늠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인구의 회자되는 그의 어록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큰 것도 사실이다. 다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회가 스티브 잡스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키고 그 이면에 있는 부정적 현상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는 그 본질을 짚어 보자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바꾸었다고는 하나 정작 바꾸었어야 하는 것은 결국 인간 의식, 이성의 진보가 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성은 잠자고, 육체는 무한 감각을 좇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것을 혁명이라는 장치, 전략 속에 감춰진 또 다른 퇴보, 퇴행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필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통화하는 목소리와 부지런히 손을 놀려가며 화면 검색을 하는 사람들 틈 속에서 호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본 원고는 <공동선>이라는 잡지에 1-2월호에 게재된 글이다.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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