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8/2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경 전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것은 단지 수천 년이 된 고문서나 단순한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고루한 서책이 아니다. 종교 경전은 인류의 진리를 담지하고 있으며 절대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종교 경전을 대한다 것은 절대 존재와의 조우이기도 하지만, 인류 정신 및 지혜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종교 경전이 오늘의 세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자라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본래 종교경전이라는 것은 개조적(個條的)인 법률서가 아니요, 자라는 힘을 가진 원리를 보여 준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1쪽)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종교 경전을 읽는 주체나 해석자의 자의적인 의미 생산으로 인해 경전의 언어적 진리가 죽어버렸다. 더군다나 그중에 하나가 교리적 가르침, 혹은 교리적 해석의 문제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러셀(B. Russell)은, “한 교리가 그 신빙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든지 없든지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태도는 증거에 대한 적대심을 자아내게 하며, 우리의 편견에 맞지 않는 모든 사실에 대해서는 이성을 가로막아버린다.”(B. Russell, 이재황 옮김, 종교는 필요한가, 범우사, 1987, 41쪽)고 비판한다.
하나의 책을 접한다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진리와 삶이 내게 특별한 의미와 감동, 그리고 깨달음을 준다는 것이요, 재미와 흥미, 혹은 원하는 지식이나 정보를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것을 통해 정신과 영혼이 자라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자라는 것은 의미를 얻은 자 스스로 자라게 마련이다. 경전의 의미가 고착되지 않고 늘 새롭게 의미가 생성될 때 자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자람은 잘 해석함을 전제로 한다. 함석헌이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2쪽)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잘 해석함은 다시 텍스트를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 자체로 인식할 때 겸손한 행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해석학적 진리는 바로 끊임없이 진리의 생수를 길어 올려 지금 살아가는 여기를 살리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래야 한다. “그들의 사명은 진리를 현대 속에 살리는 데 있다. 시대 착오의 낡은 제도 속에서 질식되려는 진리를 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3쪽)
러셀이 말한 바와 같이, 만일에 “한 사람의 정신적 계속은 습관과 기억의 계속”(B. Russell, 이재황 옮김, 종교는 필요한가, 범우사, 1987, 93쪽)이라면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신앙 선조들이 지녔던 절대 존재에 대한 경험을 상기하며 재생하는 차원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경험의 재생은 그 길을 따라-감이다. 우리보다 앞서 역사를 산 이들의 증언들이 반복적으로 사건이 될 때, 경전의 정신이 퇴색되지 않는다. 증언과 진리를 따라-감은 살아-감이고, 살아-감은 살아-있음을 경전을 통해서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경전의 사건들을 가지고 종교인 스스로 신앙의 진보 혹은 진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삶을 습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요, 그것의 원천은 경전 속에 담겨진 신앙의 진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의 신앙인은 믿음의 연속성과 정신의 유대성을 갖게 되는 것이고, 신앙인의 정체성으로서의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경전적 진리를 토대로 하는 삶이자, 경전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따라-감이라는 사건이 신앙인 나름대로 주관적 지향성을 가진 길이 되면 곤란하다. 신앙인의 삶의 철학과 실존의 근거는 편의성과 자의성에 있지 않다. 경전의 기억의 사건을 재생하는 것이 따라-감이요, 살아-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경전의 진리가 이 시대 속에서 자라-감이 되며, 동시에 살아-감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자라-감과 살아-감이 없다면 경전의 진리는 늘 현대적 진리가 될 수가 없다. 신앙인 스스로 경전의 진리를 살아-감이 있어야만 전체 인류의 정신세계가 자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러셀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면, 한 사람의 기억은 재생하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사건이 될 수가 없다. 기억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자꾸 되새기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경전의 기억, 종교경전의 사건을 재생시키는 것은 한 인간의 정신적 지속성이자 인류 전체의 생존과도 직결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종교경전의 의미를 살기
종교의 경 전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것은 단지 수천 년이 된 고문서나 단순한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고루한 서책이 아니다. 종교 경전은 인류의 진리를 담지하고 있으며 절대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종교 경전을 대한다 것은 절대 존재와의 조우이기도 하지만, 인류 정신 및 지혜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종교 경전이 오늘의 세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자라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본래 종교경전이라는 것은 개조적(個條的)인 법률서가 아니요, 자라는 힘을 가진 원리를 보여 준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1쪽)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종교 경전을 읽는 주체나 해석자의 자의적인 의미 생산으로 인해 경전의 언어적 진리가 죽어버렸다. 더군다나 그중에 하나가 교리적 가르침, 혹은 교리적 해석의 문제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러셀(B. Russell)은, “한 교리가 그 신빙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든지 없든지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태도는 증거에 대한 적대심을 자아내게 하며, 우리의 편견에 맞지 않는 모든 사실에 대해서는 이성을 가로막아버린다.”(B. Russell, 이재황 옮김, 종교는 필요한가, 범우사, 1987, 41쪽)고 비판한다.
하나의 책을 접한다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진리와 삶이 내게 특별한 의미와 감동, 그리고 깨달음을 준다는 것이요, 재미와 흥미, 혹은 원하는 지식이나 정보를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것을 통해 정신과 영혼이 자라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자라는 것은 의미를 얻은 자 스스로 자라게 마련이다. 경전의 의미가 고착되지 않고 늘 새롭게 의미가 생성될 때 자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자람은 잘 해석함을 전제로 한다. 함석헌이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2쪽)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잘 해석함은 다시 텍스트를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 자체로 인식할 때 겸손한 행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해석학적 진리는 바로 끊임없이 진리의 생수를 길어 올려 지금 살아가는 여기를 살리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래야 한다. “그들의 사명은 진리를 현대 속에 살리는 데 있다. 시대 착오의 낡은 제도 속에서 질식되려는 진리를 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3쪽)
러셀이 말한 바와 같이, 만일에 “한 사람의 정신적 계속은 습관과 기억의 계속”(B. Russell, 이재황 옮김, 종교는 필요한가, 범우사, 1987, 93쪽)이라면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신앙 선조들이 지녔던 절대 존재에 대한 경험을 상기하며 재생하는 차원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경험의 재생은 그 길을 따라-감이다. 우리보다 앞서 역사를 산 이들의 증언들이 반복적으로 사건이 될 때, 경전의 정신이 퇴색되지 않는다. 증언과 진리를 따라-감은 살아-감이고, 살아-감은 살아-있음을 경전을 통해서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경전의 사건들을 가지고 종교인 스스로 신앙의 진보 혹은 진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삶을 습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요, 그것의 원천은 경전 속에 담겨진 신앙의 진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의 신앙인은 믿음의 연속성과 정신의 유대성을 갖게 되는 것이고, 신앙인의 정체성으로서의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경전적 진리를 토대로 하는 삶이자, 경전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따라-감이라는 사건이 신앙인 나름대로 주관적 지향성을 가진 길이 되면 곤란하다. 신앙인의 삶의 철학과 실존의 근거는 편의성과 자의성에 있지 않다. 경전의 기억의 사건을 재생하는 것이 따라-감이요, 살아-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경전의 진리가 이 시대 속에서 자라-감이 되며, 동시에 살아-감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자라-감과 살아-감이 없다면 경전의 진리는 늘 현대적 진리가 될 수가 없다. 신앙인 스스로 경전의 진리를 살아-감이 있어야만 전체 인류의 정신세계가 자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러셀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면, 한 사람의 기억은 재생하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사건이 될 수가 없다. 기억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자꾸 되새기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경전의 기억, 종교경전의 사건을 재생시키는 것은 한 인간의 정신적 지속성이자 인류 전체의 생존과도 직결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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