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종자연’에 대해 딴지 거는 교회의 아이러니

by anarchopists 2019. 11.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7/2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자연’에 대해 딴지 거는 교회의 아이러니






지금 일부 교회(단체)에서는 교회 혹은 종교의 교육, 종교의 인권, 종교의 차별 문제에 관련하여 정부가 한 종교시민단체에게 용역을 맡겼다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그것은 종교적 편파성이자 부당성이기 때문에, 정부는 한 종교와 관련된 종교시민단체에게 정책을 맡긴 것은 엄연히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그에 대한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심지어 그것이 종교간의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해소하는 길은 정부가 그 용역을 거두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종교용역사업은 종교간의 갈등을 하지 말자, 혹은 종교의 차별 문제에 대해서 가급적 객관적으로 다루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일이다.


 
물론 그 단체가 한 종교 공동체와 직간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객관성을 결여하고 편파적인 결과를 유도하여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구실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것을 그리스도교와 연관이 깊은 시민단체가 맡는다면 자체 내의 종교 인권 및 차별 문제 등을 객관적으로 짚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일부 보수적인, 그리고 소박한 생각을 가진 교회연합단체가 발끈하는 이유는 그 용역을 맡은 주체가 불교 단체라는 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아직 우리 사회는 종교적 이권 다툼, 혹은 종교적 패권 다툼, 혹은 종교적 영역 다툼으로 19세
기를 넘어서지 못하는가 보다.
작가 이상(李箱)의 시를 빗대어 표현한다면, “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하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메리카의 ‘자유주의’라는 것은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소위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입니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군사적으로 과감하게 해치웁니다... 이 자유주의는 당시 사상으로 말하자면 스펜서의 사회적 다원주의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약육강식’입니다.”(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조영일 옮김,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98쪽)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오늘날의 종교도 제국주의적 약육강식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슬픈 그리스도교. 19세기의 도덕성을 향수로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우주적 구원을 논하는 신학에 모순을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우주는 그리스도교만의 우주가 아니라, 인간 모두의 우주일진대 지금 그리스도교는 자그마한 정책적 영역을 놓고 아옹다옹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 저변에 흐르는 논리도 매우 자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지금까지의 종교간 갈등의 중심에 그리스도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현정부로부터 ‘종교차별 실태조사 연구용역’을 부여받은 ‘종자연’(종교자유정책연구원)의 문제가 종교간 갈등의 문제로 확산될 우려가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종자연’이 종교편향문제, 종교인권문제 등 종교 문제를 다루겠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스도교는 시민단체의 단순한 비난과 비판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자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종교가 타자에 의한 비판으로부터 견뎌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더 건강한 종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자체 내 검증 기구의 비판이 되었든 아니면 타종교의 기구가 되었든 종교는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아가 특정종교의 시민단체가 타종교를 검증․비판한다고 하더라도 겸허하게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서 자체 내 검증기관이 아니라면 수긍할 수 없다든지, 정부가 타종교에게 용역을 맡겼기 때문에 감히 그리스도교를 흠집 낼 수 없다는 거부 반응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오만이다. 아마도 그리스도교 내부의 진보 단체가 똑같이 보수 교단의 실체를 검증․비판하겠다고 했더라도 예민하게 반응하였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엇이 그렇게도 불안하고 자신이 없는 태도란 말인가.













그리스도교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타종교의 시선을 바라보고 또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여야만 발전할 수 있다.
우리 종교 이외에는 안 된다는 배타적인 태도라든가, 왜 정부는 용역을 불교 산하의 종교시민단체-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교 산하 단체도 아니다-에게 편파적으로 맡겼단 말인가 하는 식의 색안경은 벗어 버리도록 하자. “하느님을 섬기는 법은 물론 인간들 상호간의 행위에 대한 법도 정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정책과 시민법은 종교의 일부분이며, 따라서 세속적 지배와 정신적 지배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Thomas Hobbes,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1, 나남, 2008, 161-162쪽) 하늘나라를 앞당겨 사는 사람들이라면 세속적 평가에 대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도 유대교 내부의 진보적 비판자였다. 그는 유대교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에서 이상의 말을 빌려서 말했다시피, 과거의 도덕성, 과거의 종교적 사고로 그리스도교의 현재와 미래를 발 묶어서는 안 된다. 다원화되고 다문화된 사회 속에서 종교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 중의 하나일 뿐이지 유일한 목소리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목소리로 자처하면 자처할수록 다양한 비판의 목소리는 더 거세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상의 말을 한마디 더 언급한다면, 이참에 바깥의 검증과 비판을 통해 비상(飛上)하는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그 한 번이 그리도 어렵단 말인가.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