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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환경

[김대식-제6강] 진화하는 씨알의 생명

by anarchopists 2020. 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07 09: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비욘드 씨알 텍스트
진화하는 씨알의 생명, “생명은 지속이다!”

함석헌은 근현대사 통섭의 선구자다.

함석헌의 사상 곳곳에서는 진화론적 성격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 L. Bergson, 1859-1941)과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의 진화론적 색채를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공교롭게도 올해(2009)는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Charles R. Darwin, 1809-1882)의 서거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학문적 흐름은 일찌감치 생물학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학계에서도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생소한 언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과 인문학의 다학문적 통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함석헌은 이러한 진화론을 자신의 사상에서 과감하게 사용하면서 씨알사상을 발전시켰으니 어찌 보면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사의 통섭의 선구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세계의 발달만 아니라...... 새 인류가 나타날 가능성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이 진화의 시점’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을 ‘생각을 전체로서 하는 사회’라고 덧붙입니다. 전체를 바라보는 생각, 속이 깊은 생각, 우주 전체를 바라보는 생각, 생각을 곱씹어 볼 줄 아는 생각을 가진 사회가 새로운 인류로 등장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진화(to evolve)하는 것이 생명”인데, 이 “생명은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삶숨’은 전체이고, 전체로서 바라봐야 합니다. 그가 “한 개 한 개의 생명은 다 우주적 큰 생명의 나타난 것이다.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 몸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삶숨은 개체적 존재이지만 전체 안에서의 개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터져 나가는 우주에 산다. 우리가 터져 나가는 우주다. 우주의 씨알이다. 우주의 한없는 겨레가 터져 나올 씨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는 움직이는 우주요, 인생은 자라는 인생”입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은 영원히 되자는 이, 되어가고 있는 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래서 우주의 역사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진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는 혁명적(to revolve)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씨알(사상)은 어떻게 진화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씨알은 지구윤리를 넘어서, 어쩌면 함석헌의 사상까지도 넘어서, ‘우주의 윤리’를 주창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함석헌 자신도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앞으로 윤리는 우주윤리지, 인간에게만 한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윤리는 생명적, 유기적 통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생명을 먹고야 사는 이 생명일 수 없다. 남 죽이지 않고 나 스스로 사는 것이 영이다. 하나님은, 즉 진화의 목표는 영이다. 영이 되기 위해 불살생을 연습해야 한다.” 진화의 오메가 포인트는 나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살생을 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정신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남을 죽이면서 스스로 살아 숨 쉰다[삶숨]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우주에 대한 마음씨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때까지 한 것처럼 우주는 죽은 것이라든지, 객관적인 존재라든지, 마음대로 개척하고 정복할 것이라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든지, 더구나 무슨 적의나 있는 듯이 하는 생각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우주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너와 하나를 이룬 한 인격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본래 사람은 우주와 하나였다.” 우주와 하나였던 큰 생명이자 ‘옹근 생명’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에 대해서 속 깊이 그리고 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동물식물과도 감응, 감화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예사로이 다루지 않게 됩니다.

“생명은 생각을 한다”,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의식작용은 거의 우리 사람에만 국한된 듯이 보이나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동물식물에 생각이 있다는 것은 이제는 의심할 여지도 없지만 소위 무생물이라는 것에도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느냐,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느냐는 그렇게 간단히 집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주 안에서 인간만이 의식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독단과 편견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으로가 아니라 겸손으로, 강함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알갱이요, 또 인류의 알갱이, 따지고 보면 우주 진화의 알갱이입니다.” 사랑과 겸손, 존경과 인격의 대상으로서의 우주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의식이 진보되었다는 척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지속이다”라는 말이 힘을 얻으려면 인간의 생각 또한 진보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자연은 우리 어머니입니다”라는 함석헌의 다소 진부해 보이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면 인간은, 씨알의 생각은 더 진보해야 할 것입니다. “고상한 정신 살림이라 하는 것도 자연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윈의 자연선택의 논리에 따라 씨알의 사상이 앞으로 도태되지 않고[외면당하지 않고 혹은 부적자(不適者)가 되지 않고], 적자(適者)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씨알들이] 다함께 “우주의 심정”을 갖고 온 삶숨을 위해 “사랑의 합창”을 할 수 있느냐 혹은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우주의 삶숨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삶숨을 위해서 말입니다. (김대식, 끝)


그 동안 김대식 박사의
"함석헌과 생태사상"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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