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8/12/08 23:52 함석헌을 ]에 발행한 글입니다.
2. 위기의 진단과 공인정신이 아쉬운 현실 - 철저한 공인정신의 화신 함석헌
함석헌은 상아탑에 안주한 먹물학자가 아니었다.
사회현실이 그의 분석자료이며 연구주제였다. 학자들이 의존하는 추상적 이론을 동원하지 않고 문제와 해답을 직관적으로 찾아냈다. 사사로운 이익과 주관에 좌우되지 않은 ‘맨 사람’ 정신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공평한 것이었다.
그는 90평생의 대부분을 철저히 공인으로 살았다.
그보다 더 공인으로 산 사람이 또 있을까 말해보라.
가장 공인이어야 할 대통령들을 보라.
누가 선공후사(先公後私)한 사람이었나.
공사다망(公私多忙)했지만 결국 공인 부분이 사인 부분을 앞지르지 못했다.
그에 비해 함석헌은 지공무사(至公無私)의 경지를 추구하면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살았다. 그렇기에 그의 현실진단은 공평무사하고 핵심을 찌른다. 이승만, 박정희는, 결과론적이지만, 그의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아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실제로 그는 두 정권을 비판하다 수난을 당했다.
자신의 영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대부분의 정치인, 학자들처럼 사익을 앞세우는 기회주의자가 못 되었다. 그가 얻게 된 명예조차 50대 후반에 마지못해 <사상계>에 끌려나와 떠밀려서 글을 쓰다가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기념한다, 연구한다 하면서 함석헌을 팔아서 자기 영예와 이익을 도모하고 있는 사람들만 득시글거리고 있다.
앞 글에서 나는 함석헌의 생각을 따라서 현재의 위기가 정치와 언론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함석헌은 정치의 잘못 배후에 언론매체, 특히 신문이 있다고 보고 큰 책임을 지웠다.
“[나쁜] 풍토를 어떻게 고칩니까? 뒤집어엎어야 해! 누가 뒤집어엎습니까? 씨알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미운 것은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알의 눈이요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씨알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 극장, 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사실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 신문이 민중을 깨우고 일으키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상황이 바뀐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지금도 들어맞는 판단이다. 나아가서 그는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었다.
“이 나라에 신문은 없다. 있는 것은 광고지지, 씨알의 피와 땀과 혼을 살살 뽑아내는 갈대통이지, 그들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콧구멍이 되는 신문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천하에 밝혀달라고 일제시대 이래 자유와 정의의 투쟁의 전통을 가졌노라 자랑하는 『ㅇㅇ일보』『ㅇㅇ일보』에 우리 입으로 직접 호소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못하겠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것이 어찌 신문인가? 내 마음으로 한다면 벌써 ‘근조ㅇㅇ일보’(謹弔ㅇㅇ日報) ‘애도ㅇㅇ일보’(哀悼ㅇㅇ日報)의 만장을 그 문 앞에 가져다 세운지 오래다.” (이름 생략-필자)
이것은 1972년에 쓴 글인데 그 이후에도 이 신문들은 탈바꿈을 하거나 독자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거나 참회함이 없이 버텨오면서 이 땅의 정치와 나라운명을 좌지우지해왔다. 오늘의 정치상황에 이르게 된 것도 이들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함석헌을, 이 새로운 형태의 인터넷 신문을 통해서, 다시 들먹여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쇄신문들은 대부분 재벌이나 족벌, 종파의 선전지나 회보, ‘광고지’로 전락되어 독자를 우롱하고 국민을 우민화하고 있다. 국민을 의식이 마비된 소비자와 우중으로 몰아가고 있다. 독자는 그것을 알고도 속을 만큼 어리석은 백성(우민)이 되어있다. (그러기에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이미(1970년) 함석헌은 언론을 정죄했다.
“저 신문장이들을 몰아내라. 잡지장이 연극장이, 라디오 텔레비장이들을 모두 몰아내라. 그놈들 우리 울음 울어달라고 내세웠더니 도리어 우리 입 틀어막고 우리 눈에 독약 넣고 우리 팔다리에 마취약 놔버렸다.” 생각 없고 행동 못하는 백성을 탓하기도 했다. “사실 국민이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 없이 불매동맹을 해서 신문이 몇 개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
일간만 아니고 신문은 주간, 스포츠, 월간, 여성지, 경제지 등 잡지언론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원리에도 충실하지 않으면서 공공매체가 사익(私益, 社益)에만 급급하여 무법, 무리한 짓을 하고 있다.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까지 타락, 오염시키고 있다. 스포츠, 언론, 교육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재벌과 더불어, 족벌언론은 국민들의 삶을 그야말로 좌지우지(좌는 재벌 우는 언론)하고 있다. 물론 두, 세 신문이 이 거대언론과 맞서서 대안신문으로 감투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아직 미약하다. 한번 오염된 물은 정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한 가지 큰 희망이 있다면 공평한 인터넷 신문이다.
오죽했으면 함석헌이 월간잡지(<씨알의 소리>)를 그 시대(1970)에 창간했을까만, 그는 급변하는 세상의 소식을 빨리 전달하기 위해서 주간잡지를 구상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매일 매시간 소식을 전해주는 인터넷 신문을 보았으면 그는 환호작약했을 터이다. 공명정대, 공평무사한 인터넷 신문이야말로 새 시대의 진정한 ‘씨알의 소리’이다.
2. 위기의 진단과 공인정신이 아쉬운 현실 - 철저한 공인정신의 화신 함석헌
김영호(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 인하대명예교수)
함석헌은 상아탑에 안주한 먹물학자가 아니었다.
사회현실이 그의 분석자료이며 연구주제였다. 학자들이 의존하는 추상적 이론을 동원하지 않고 문제와 해답을 직관적으로 찾아냈다. 사사로운 이익과 주관에 좌우되지 않은 ‘맨 사람’ 정신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공평한 것이었다.
그는 90평생의 대부분을 철저히 공인으로 살았다.
그보다 더 공인으로 산 사람이 또 있을까 말해보라.
가장 공인이어야 할 대통령들을 보라.
누가 선공후사(先公後私)한 사람이었나.
공사다망(公私多忙)했지만 결국 공인 부분이 사인 부분을 앞지르지 못했다.
그에 비해 함석헌은 지공무사(至公無私)의 경지를 추구하면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살았다. 그렇기에 그의 현실진단은 공평무사하고 핵심을 찌른다. 이승만, 박정희는, 결과론적이지만, 그의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아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실제로 그는 두 정권을 비판하다 수난을 당했다.
자신의 영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대부분의 정치인, 학자들처럼 사익을 앞세우는 기회주의자가 못 되었다. 그가 얻게 된 명예조차 50대 후반에 마지못해 <사상계>에 끌려나와 떠밀려서 글을 쓰다가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기념한다, 연구한다 하면서 함석헌을 팔아서 자기 영예와 이익을 도모하고 있는 사람들만 득시글거리고 있다.
앞 글에서 나는 함석헌의 생각을 따라서 현재의 위기가 정치와 언론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함석헌은 정치의 잘못 배후에 언론매체, 특히 신문이 있다고 보고 큰 책임을 지웠다.
“[나쁜] 풍토를 어떻게 고칩니까? 뒤집어엎어야 해! 누가 뒤집어엎습니까? 씨알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미운 것은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알의 눈이요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씨알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 극장, 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사실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 신문이 민중을 깨우고 일으키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상황이 바뀐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지금도 들어맞는 판단이다. 나아가서 그는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었다.
“이 나라에 신문은 없다. 있는 것은 광고지지, 씨알의 피와 땀과 혼을 살살 뽑아내는 갈대통이지, 그들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콧구멍이 되는 신문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천하에 밝혀달라고 일제시대 이래 자유와 정의의 투쟁의 전통을 가졌노라 자랑하는 『ㅇㅇ일보』『ㅇㅇ일보』에 우리 입으로 직접 호소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못하겠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것이 어찌 신문인가? 내 마음으로 한다면 벌써 ‘근조ㅇㅇ일보’(謹弔ㅇㅇ日報) ‘애도ㅇㅇ일보’(哀悼ㅇㅇ日報)의 만장을 그 문 앞에 가져다 세운지 오래다.” (이름 생략-필자)
이것은 1972년에 쓴 글인데 그 이후에도 이 신문들은 탈바꿈을 하거나 독자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거나 참회함이 없이 버텨오면서 이 땅의 정치와 나라운명을 좌지우지해왔다. 오늘의 정치상황에 이르게 된 것도 이들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함석헌을, 이 새로운 형태의 인터넷 신문을 통해서, 다시 들먹여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쇄신문들은 대부분 재벌이나 족벌, 종파의 선전지나 회보, ‘광고지’로 전락되어 독자를 우롱하고 국민을 우민화하고 있다. 국민을 의식이 마비된 소비자와 우중으로 몰아가고 있다. 독자는 그것을 알고도 속을 만큼 어리석은 백성(우민)이 되어있다. (그러기에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이미(1970년) 함석헌은 언론을 정죄했다.
“저 신문장이들을 몰아내라. 잡지장이 연극장이, 라디오 텔레비장이들을 모두 몰아내라. 그놈들 우리 울음 울어달라고 내세웠더니 도리어 우리 입 틀어막고 우리 눈에 독약 넣고 우리 팔다리에 마취약 놔버렸다.” 생각 없고 행동 못하는 백성을 탓하기도 했다. “사실 국민이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 없이 불매동맹을 해서 신문이 몇 개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
일간만 아니고 신문은 주간, 스포츠, 월간, 여성지, 경제지 등 잡지언론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원리에도 충실하지 않으면서 공공매체가 사익(私益, 社益)에만 급급하여 무법, 무리한 짓을 하고 있다.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까지 타락, 오염시키고 있다. 스포츠, 언론, 교육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재벌과 더불어, 족벌언론은 국민들의 삶을 그야말로 좌지우지(좌는 재벌 우는 언론)하고 있다. 물론 두, 세 신문이 이 거대언론과 맞서서 대안신문으로 감투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아직 미약하다. 한번 오염된 물은 정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한 가지 큰 희망이 있다면 공평한 인터넷 신문이다.
오죽했으면 함석헌이 월간잡지(<씨알의 소리>)를 그 시대(1970)에 창간했을까만, 그는 급변하는 세상의 소식을 빨리 전달하기 위해서 주간잡지를 구상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매일 매시간 소식을 전해주는 인터넷 신문을 보았으면 그는 환호작약했을 터이다. 공명정대, 공평무사한 인터넷 신문이야말로 새 시대의 진정한 ‘씨알의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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