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Line Ham강좌(1)20081112]
시인 함석헌을 말한다(1)
김경재(한신대명예교수)
서울 대학로변, 흥사단 건물과 동성중고등학교 중간쯤의 위치에, 사람들이 잘모르는 시비(詩碑) 하나가 서있다. 커다란 둥근모습의 자연석 한쪽면을 갈아낸 후 함석헌의 꽤 유명한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시가 아로새겨져 있다. 오늘의 신세대들이, 함석헌이란 분은 흰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 신고 흰 수염 날리면서 30년전 한국민주화를 이끌던 재야인사 대부였다고 기억한다면, 역사지식의 성적이 괜찮은 셈이다. 그렇다. 함석헌은 민주주의 운동과 통일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장준하와 문익환이 존경하는 큰 선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 한복판에서 뜨겁게 열정적으로 살다간 사람들이면서도 묘하게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탁월한 문인들 이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함석헌이 탁월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않다. 도서출판 한길사가 간행한 『함석헌 전집』 20권중 여섯째 권 「수평선 너머」가 낱권으로 된 함석헌의 시집인 것이다. 그 안에 300여편의 탁월한 시가 크고작은 진주처럼 혹은 정련되지 않은 금광석처럼 실려있다. 앞서 언급한 대학로변의 시비에 새겨진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음미해보자.
만리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 맘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 만은 제발 살아다도”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 “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 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문학에서 시를 어떻게 규정하던지, 상식적으로 말하면 시라는 것은 자기의 내면 맘의 지성소에서 경험한 깊은 정서적 느낌, 생각, 깨달음을 언어가 지닌 의미․ 리듬․ 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체험의 표현이다. 흔히 서정시와 산문시의 통속적 구별은 별의미가 없지만, 위 시는 산문시에 가깝다. 함석헌에게는 김교신이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자기가 옥중에 있어서 부모님의 임종을 지킬 수 없을 때, 상주노릇을 대신 해준 이가 김교신 이었다. 함석헌 마음엔 김교신 같은 친구나, 장준하, 문익환 같은 제자벌의 인물들을 생각하며 “나는 그 사람을 가졌노라”고 말 할 수 있었다. 예수도 마지막엔 제자들을 친구라 불렀다.
진정한 친구란 피를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의 혈연관계와 다르고, 부부나 연인같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친밀관계와도 다르다. 종교적 정치적 이념이 같아서 뜻이 통하는 동지와도 다르며, 같은 회사의 이익공동체 동료라는 어울림 때문에 맺어진 직장동료와도 다르다. 진정한 친구란 묘한 것이다. 어떤 이해관계나, 생각차이나, 유익불익 관계와 아무관계 없이, 그 맘을 끝까지 믿어주고, 그 맘의 중심이 착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가 풍진세상 속에사 시달리다 약해져서 만부득이 내게 거짓말을 하더라도 속은척 속아주고, 서로 아껴주고, 마침네 언젠가는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을 믿는 성실과 사랑의 꽃피어남이 친구이다.
함석헌은 300여편의시를 남기고도 문단에 등장하지 않은 빼어난 재야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 맨 처음에 나오는 「맘」이라는 시제(詩題)가 붙은 대표적 시 한수를 다시 감상해 보자.
맘은 꽃 / 골짜기 피는 난(蘭) /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 맑은 향(香)을 토해.
맘은 시내 / 흐느적이는 바람에 부서지는 냇물 / 환란이 흔들면 흔들수록 /
웃음으로 노래해.
맘은 구름 /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 한 때 한 곳 못 쉬건만 / 늘 평안한
자유를 얻어.
맘은 높은 봉 / 구름으로 눈물 닦는 빼어난 바위 / 늘 이기건만 늘 부족한 듯 /
언제나 애타는 얼굴을 해.
맘은 호수 / 고요한 산 속에 잠자는 가슴 / 새벽 안개 보드라운 속에 /
헤아릴 수 없는 환상을 길러.
맘은 별 / 은하 건너 반짝이는 빛 / 한없이 먼 얼굴을 하면서 /
또 한없이 은근한 속삭임을 주어.
맘은 바람 / 오고감 볼수 없는 하늘 숨 / 닿는 대로 만물을 붙잡아 /
억만 가락 청(淸)의 소리를 내.
맘은 씨 /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맘은 차라리 처녀 / 수줍으면서 당돌하면서 / 죽도록 지키면서 아낌없이 바치자면서 /
누구를 기다려 행복 속에 눈물을 지어.
위 시는 서정시 같은 기분을 자아내면서도 단순히 자연을 노래한 낭만적 자유시가 아니다. 시제는 「맘」이지만 아홉 연(聯)으로 이어가며 맘을 꽃, 시내, 구름, 산봉우리, 호수, 별, 바람, 씨, 처녀에 비유하여 깊은 철학적 사색을 독자에게 불러일으킨다. 특히 ‘맘’을 씨이라고 은유하면서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라고 노래한다. 사실 알고보면, 함석헌의 씨알사상이란 이 한편의 시 안에 다 들어있는거나 다름 없다.
맘은 육체로서의 몸과 정신으로서 마음의 통전적 실재이다. 사람의 맘은 45억년 지구 진화사의 끝에 피어난 꽃이요 영글어진 씨알이라고 본다. 이 씨알은,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이면서도, 흙이 없으면 발아도 아니되고 자라지도 못하고, 물론 여물지도 못한다. 골짜기에 피어난 한 청순한 난초가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내듯이” 인간의 정신적 인격체가 자라고 향기를 발휘하려면, 역사와 문화의 토양으로서 흙 없이는 불가능하다. 저 혼자 잘나고 똑똑해서 잘먹고 잘사는 것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정신 년령이 유치원생 같은 철없는 어린아이다. 오늘의 나의 삶, 나의 존재 자체가 아무리 어려운 형편일지라도, 무수히 많은 씨생명체들의 숭고한 봉사와 희생의 거름위에 피어난 한송이 꽃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 철저한 깨달음에서부터 새로운 21세기 문명사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On Line Ham강좌(2)20081113]
시인 함석헌을 말한다(2)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연구하는 방법과 시각이 다양할 수 있다. 우리는 “시인 함석헌을 말한다(1)” 에서 시인으로서, 문필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함옹을 생각하는 여정에 올랐다. 오늘도 계속해서 그의 시작품을 통해서 나는 젊은 독자들과 함께 함석헌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정중동, 동중정’(靜中動, 動中靜)이란 말이 있다. 한문 글자 뜻 그대로, “ 고요함 속에 움직임 있고, 움직임 중에 고요함 있다”는 뜻이다. 철학사를 쭉 훌터보면 실재를 ‘정중동’의 관점에서 보면서 ‘생성’(becoming) 보다는 ‘존재’(being)를 존재론적으로 보다 우위에 놓고 보려는 입장이 있다. 그 반대로 사물의 본질을 ‘동중정’의 관점에서 보면서 세계, 삶, 역사를 ‘생성과정’ 혹은 ‘형성과정’으로 보려는 입장이 있다. 존재보다 생성이 더 근원적이고 진실의 참 모습이라는 입장이다.
함석헌은 어떤 입장의 사상가일까? 필자가 보기엔 ‘존재’보다는 ‘생성’을 강조하는 사상가이다. 그의 전공이 변화를 특징으로하는 역사공부이고, 그의 역사관을 터놓을 때 영향받은 사상가들로서 성서의 예언자들, H.G. 웰스, H. 베르그송, 마찌니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사상은 매우 역설적인 면이 있다. ‘생성’을 강조하면서도 ‘지금-여기’ 영원한 것의 현현(顯現)을 강조하는 종교신비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이러한 역설적 양면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두 개의 시작품인 「미완성」과 「하나님」이라는 작품을 차례로 음미해보도록 하자. 먼저 6연(聯)으로 구성된 산문시 작품 「미완성」의 후반부를 인용해 본다.
완성은 반갑다고 누가 그러나?
끝맺음은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나?
얻어들음은 즐겁다고 누가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완성할 줄 모르는 영감(靈感)의 거장(巨匠),
역사는 영원히 끝날 줄 모르는 절대의 의지.
영원의 미완성,
영원히 자라는 혼의 타는 그 가슴엔
지극히 적은 부분의 불꽃마다 제대로 무한한 즐거움,
끝없이 닫는 영의 헐떡이는 염통엔
찰나 찰나의 고동의 울림마다 그대로 영원한 이김.
영원의 미완성품 만세 !
영원히 높아가고 확대해가는 정신 만세 !
영원히 영광을 더해가며 벌어져 나가는 생명의 불바다 만세 !
아킬레스 거북을 쫒아잡지 못하듯이
그칠줄 모르고 닫는 인생아 네 걸음걸이에 무한한 기쁨 있을 지어다.
위 시 속에서, 우리는 함석헌이 한국의 ‘생의 철학자’로서 혹은 ‘과정철학 사상가’로서 독특한 진면목을 본다. 그는 우주 대자연, 역사, 삶 그 모든 것이 고정되어있거나,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본다. “되풀이하면서 자람”이 존재와 생명의 실제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해가면서 무한히 전진하고 상승하는 창조적 과정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유념할 것은 과정은 목적에 이르는 한 예비적 준비단계가 아니라, 각 단계의 순간순간이 무한한 즐거움과 목적 그 자체라는 것이다.
함석헌의 실재관이 ‘존재’ 우위의 실재관 이라기보다 ‘생성’우위의 실재관이라고 필자는 잠정적 판단을 내린바 있다. 그런데, 그의 종교시 중에는 작가 자신이 경험한 ‘존재체험으로서 신비경험’을 노래한 것이 있는데, 그 대표적 작품이 「하나님」이라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던지는, 그리고 시제(詩題)로서는 적절하지 않는 시이다. 전문을 먼저 감상해보자.
몰랐네 / 뭐 모른지도 모른 / 내 가슴에 대드는 계심이었네.
몰라서 겪었네 / 어림없이 겪어보니 / 찢어지게 벅찬 힘의 누름이었네.
벅차서 떨었네 / 떨다 생각하니 / 야릇한 지혜의 뚫음 이었네.
하도 야릇해 가만히 만졌네 / 만지다 꼭 쥐어보니 / 따뜻한 사랑의 뛰 놂이었네.
따뜻한 그 사랑에 안겼네 / 푹 안겼던 꿈깨어 우러르니/ 영광 그득한 빛의 타오름이었네.
그득 찬 빛에 녹아버렸네 / 텅비인 빈탕에 맘대로 노니니 /거룩한 아버지와 하나됨이었네.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나 모르는 내 얼 빠져든 계심이네.
위 시는 전형적인 신비체험을 노래한 종교시이다. 이 시안에서 작가는 흔히 동서 신비주의 사상가들이 말하는 ‘일치의 신비’(unity mysticism)와 ‘연합의신비’(union mysticism)의 대립적 갈등을 넘어서 두가지 전통이 증언하는 신비체험을 절묘하게 시적 언어로서 통전시킨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교 배경을 안고 자란 함석헌이 성장해가면서 노장철학사상, 유교사상, 불교사상과 접하면서 그 자신의 사상적 지평 안에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융합시킨 것이 위의 종교시로 나타나 있다. ‘계심’이라는 추상명사의 우리말 표현은 ‘존재자체이신 하느님’을 말한다. 그런데, 그 궁극적 실재가 정태적인 단순한 원리나 법칙이 아니라, “대드는 계심, 벅찬 힘의 누름”으로 다가오시는 분이라는 체험이다.
그렇지만, 그 신비체험의 대상자가, 신들린 무당의 탈아상태 엑스타시 속에서 자기 정신을 잃어버리도록 덮쳐오는 권위적 타자가 아니라, “지혜의 뚫음, 사랑의 뛰 놂, 빈탕에 노닐게하는 자유”로 체험된다. 텅빈 공(空)이면서 그득찬 충만으로 체험되었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상대적 개념들의 경계가 살아져버리는 경지, “없이 계신 하느님” 체험의 자리였다. 함석헌의 위 종교시에서 우리는 동서철학과 종교가 서로의 특징을 간직하면서도 열린자세로 창조적으로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를 지시하는 하나의 원형적 사례를 보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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