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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정치 지도자는 수신, 곧 자기 마음을 먼저 닦아야 한다

by anarchopists 2019. 11.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3/0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눈으로 보는 동양철학]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영향사적 의미




1. 『大學』에 나타난 格物致知

『대학』의 도는 明德을 밝히고, 백성을 사랑하고(親民), 지극한 선(최고선)에 머무는 데(止於至善) 있다. 옛날 천하에 명덕을 밝히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국가를 잘 다스리고(治國), 국가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가정을 가지런히 하고(齊家), 자기 가정을 가지런히 하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修身), 자신을 수양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바로 잡고(正心), 자기 마음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은 자기의 뜻을 진실되게 하며(誠意), 자기의 뜻을 진실되게 하려는 사람은 지식을 넓히며(致知), 지식을 넓히려고 하는 사람은 사물을 연구하여야(格物) 한다. 사물이 연구된 다음에야 뜻이 진실되고 뜻이 진실된 다음에야 마음이 바로 잡히고 마음이 바로잡힌 다음에야 자신을 수양할 수 있고 자신을 수양한 다음에야 가정을 다스릴 수 있으며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다음에야 국가를 다스리고 국가를 다스린 다음에야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後能慮, 慮而後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濟其家; 欲濟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大學》). 『대학』에서는 격물치지, 곧 사물을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것을 수신을 위한 방법이며, 정신수양의 방법으로 보고 있다.



2. 주희의 격물치지

  신유가에서는 『대학』을 '덕있는 생활에 들어가는 입문서'로 간주하였다. 사물을 연구함(格物, investigation of things)과 지식을 넓힘(致知, extention of things)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정주학파에 의하면 격물의 목적은 영원한 이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 데 있다. 주희가 격물이라 말한 것은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연구함”(卽物窮理)을 의미한다. 이것은 각각의 일이나 사물로부터 이치를 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어째서 이치의 탐구(窮理)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사물의 연구’(格物)로부터 하는가? 주희가 ‘대학에서 격물은 말하면서도 궁리는 말하지 않은 까닭은 대개 궁리를 말하면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덩그런 허공을 움켜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단지 격물만을 말하면, 그것은 곧 형이하의 구체적 사물(器)에서 형이상의 원리(道)를 찾는 것이 된다(大學所以說格物, 却不說窮理, 蓋說窮理, 則似懸空無捉摸處. 只說格物, 則只就那形而下之器上, 便尋那形而上之道. 《語類: 卷 62》). 다시 말하면 이치는 추상적이요, 사물은 구체적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것을 통해 추상적인 것을 탐구해야 한다. 그 결과 무엇이 영원한 세계에 있으며, 또 무엇이 우리의 본성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치에 관하여 알면 알수록 보통은 형체에 가려진 그 본성이 더욱더 잘 보이게 된다.



3. 양명학에서 본 격물치지

  왕수인에게 있어 8조목은 모두 ‘致良知’라는 하나의 조목으로 환원된다. 대학에서의 8조목에서 처음 두 조목이 격물과 치지이다. 그런데 왕수인에 따르면 致知는 곧 致良知이다. ‘수신’은 자기의 양지를 따라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왕수인에 의하면, 格은 ‘格者正也’(바로 잡는다)이다. 物이란 事(物者事也)이다. 그에게 양지는 일상사를 처리하는 일상생활의 체험을 통하여 넓혀진다. 마음이 발동된 것(所發)이 뜻이요, 뜻(意)이 지향하여 있는 곳이 바로 物이다. 예컨대, 자기의 뜻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 있다면 이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바로 물이요, 자기의 뜻이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껴 주는 데 있다면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껴 주는 것이 바로 物이다(心之所發便是意, 意之所在便是物. 如意在於事親, 卽事親便是一物. 意在於人民愛物卽, 人民愛物便是一物. 《傳習錄: 上》).


  이 물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비가 결정되자마자 곧 우리의 양지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양지가 한 일이 옳다고 인정하면 우리는 성실하게 실천하고, 우리의 양지가 그것을 그르다고 인정하면 우리는 중단하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事를 바로 잡고(格物), 또 우리의 양지를 넓힌다(致知). 일을 바로 잡지 않고 양지를 넓히는 방법은 없다. 대학에서 “지식을 넓히는 것은 일을 바로 잡는 데 있다.”(致知在格物)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8조목’의 다음 두 단계는 ‘誠意’와 ‘正心’이다. 왕수인에 의하면 성의는 격물과 치지가 가장 성실하게 수행되는 것,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양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변명거리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뜻에 성실하지 못함이 있다. 이 성실하지 못함은 정명도, 왕수인이 말하는 ‘사사로운 욕심과 보잘 것 없는 꾀’(自私用智)에 불과하다. 뜻이 성실하면 마음은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심이란 성의에 지나지 않는다.



4. 大學讀後感

  이상과 같이 격물치지에 대한 대학과 주희, 왕양명의 사상을 살펴보았다. 『대학』의 격물치지는 군자가 수신하는 방편으로 삼는 정신수양의 극치를 드러낸다고 볼 때, 주희는 사물의 궁극적인 이치를 탐구하여 豁然貫通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사물의 연구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학『은 먼저 지식을 넓히는 일(치지)가 먼저이고, 사물을 궁리하는 것(격물)을 나중으로 생각한 반면에, 주희는 사물 이면의 도를 확연히 꿰뚫기 위해서는 먼저 격물해야만 하고, 그 다음에 치지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왕양명의 경우에는, 마음과 사물의 이치가 다르지 않다(心卽理). 주희가 사물과 이치를 구분해서 보고 있다면, 왕양명은 그 둘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학』의 모든 8조목은 치양지로 환원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양지가 바르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수신의 근본이며, 인(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인간의 일상사에서 양지가 바르게 드러나고(치지) 그 양지를 통해서 일이 바로 서는(격물) 것을 말하고 있고, 일이 바로 섬으로써 치지 또한 넓혀진다는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는 격물치지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을 인간 심성에 관한 것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덕치를 위한 수단적, 방편적 처세에 관한 글로 볼 것이냐의 이분법적 설명은 『대학』을 읽기 위한 초입부터 장벽에 부딪친다. 『대학』에서 정치는 인간의 본성이 덕스럽게 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정치가는 먼저 수신이 되어야지만 평천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대학』을 놓고 덕치론이냐, 인간 심성론이냐를 논한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시각은 아닌 듯싶다. 대인이란 흔히 큰 의를 이루기 위해서 국가의 막중대사를 논하는 것으로 일컫기가 쉽지만, 그리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태생부터 가지고 있던 밝은 덕성을 밝힐 필요가 있다(明明德). 그런데 그 덕성을 천하에 밝히기 위해서 어찌 해야 하는가? 먼저 수신해야 할 일이다. 이 수신의 방법은 어디 있는가. 격물치지, 곧 도덕적 판단 능력과 앎을 넓히고 투철하게 해서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야 한다.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상당히 이상적인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선현의 지혜가 어디 부족하던가(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늘 그 理想을 실현하는 것이 정치의 구현인 것을 오늘날의 정치가들이 깨달아야 할 일이다.


정치 지도자는 물론이거니와 범부도 인하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만 한다(爲人君, 止於仁). 그가 머물 바를 안다는 것은 그의 본성의 발현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의 본성이 나타나는 그대로(良知 혹은 致良知)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풀어갈 때에 지도자의 덕성이 펼쳐질 것이다. 그 본성적인 덕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 인위적 제도와 제재들보다 힘과 권위가 될 수가 있다(大畏民志, 此謂知本). 그 힘과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신독(愼獨)이다. 홀로 있을 때조차도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사유는 조신해야 한다. 누가 그 마음을 본다고 자신의 내면의 움직임과 생각을 제어해야 하는가? 그러나 군자는 오히려 아무도 안 보는 데서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자신의 움직임과 생각이 곧 민초의 마음임을 깨닫는다면 말이다.


『대학』은 초지일관하여 修身을 말하고 있다. 이는 정치가가 가져야 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역대 모든 정치가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주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德政을 펼치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정치란 무릇 자신의 심신을 맑게 하고, 본성의 덕을 밝히 드러내는 일에 힘쓰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치가라면 으레 민초의 마음과 民意를 읽어야 한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대학』을 지은 선현은 그보다 먼저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홀로 있을 때조차도 남이(백성이) 보고 있는 것처럼 조신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새로 선출될 국회의원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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