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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

절망 속에 대안은 있는가- 민족성 개조

by anarchopists 2020. 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7/02 09:09]에 발행한 글입니다.


절망 속에 대안은 있는가
민족성 개조? (1)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상류층이나 중산층 일부에 속한 개인(‘나’)에게는 아마 있을지 모른다. 어떤 부류처럼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살 수는 없지만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크게 불평할 것 없는 상태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넘어서 ‘우리’ 단위에서 보자면 희망이 있는 것인가. 나만 평안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들이 속한 사회집단일 수도 있고, 민족공동체일 수도 있고, 세계나 인류공동체일 수도 있다. 좁게는 ‘우리’가 가족, 소수 특권층, 강남귀족층, 부유층, 일부 지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우리’는 소수의 ‘우리’이지 다수나 전체의 ‘우리’가 아니다. 문제는 더 큰 사회, 민족공동체에서 소수의 ‘우리’만이 실체적으로 아니면 심리적으로라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강북 없는 강남이 있을 수 있는가. 지방 없는 서울만이 존재할 수 있는가. 개인으로나 사회로서나 우리의 삶은 무언가 뒤틀려있고 온전치 못한 모습이다. 비관적인 전망은 점차 더 심해지는 양극화 문제를 보면 더 확실해진다. 당장 해고위기에 몰려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법안 처리를 놓고 벌이는 여야대치가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입법부는 물론, 행정부와 사법부에 희망을 걸 수 있는가.

나와 우리의 관계는 연기적, 유기적인 것이다. 이것 없이 저것이 있을 수 없다. ‘나’ 속에 ‘우리’가, ‘우리’ 속에 ‘나’가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없이 ‘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나만이 존재한다는 유아론(唯我論solipsism)은 극단적인 사변에 속한다. 우리/나는 공(公)/사(私)의 문제이기도하다. 한 개인에게는 공인, 사인 양면이 다 있다. 이상적으로는, 특히 공인에게는, 공적인 측면이 앞 선 삶이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두 가지가 다 발휘되는 삶이 기대된다. 아무리 개인주의라도 사회발전과 공익을 무시한다면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삶의 질, 복지에 손상이 간다.


요새 부쩍 사회의식은 없어지고 개인주의적 욕구에만 충실해지는 젊은이들은 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여 투표권행사도 잘 하지 않은 결과로 수구정권이 등장하여 교육문제, 취업문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서구사회에서도 공익정신이 강하고 젊은 층의 정치참여가 활발하다. 대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주의와 사회주의는 결국 만나게 되어있다. 다 인간을 위하자고 내세워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건,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개인과 사회(백성/인민)를 위하자는 동기에서 출발했다. 문제는 그 근본정신을 위배하는 이기적인 관리자, 지배자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것이다.

남아있는 공산주의 국가는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다. 중국은 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살아남고 있다. 참다운 민주주의와 자유선택이 보장된 공산주의만 살아남을 수 있다. 왕조체제 같이 체제를 굳히고 있는 북한사회를 보면서 그리고 같은 수준에서 대응하는 현 정권의 행태와 태생적 한계를 보면서 부끄럽고 서글퍼진다. 지도자가 인격이 있는지, 나라는 국격(國格)이 있게 보이는지. 국제사회에서 고개를 들 수 있다면 자기를 속이는 행위다.
이렇게 오래 시행착오를 반복할 바에는, 차라리 지도자나 장관(특히 교육부와 문화부)을 용병처럼 수입하면 어떨까.

우리가 자정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더 이상 시행착오와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북구국가, 캐나다, 호주 등) 선진복지국가들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분단과 통일 문제에서도 마치 신라가 고구려를 대하던 적대관계가 계속되는 것 같다. 영토는 통일신라시대처럼 축소되었다. 오늘의 분단은 신라중심의 잘못된 삼국통일로 거슬러 간다고 일찍이 함석헌은 통탄했다. 이러다가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동경도지사가 망언했듯이, 고구려 땅을 중국에 넘겨줘야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이대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은 이 사회의 다른 측면을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사회가 양극화와 물질주의 일변도의 가치관을 극복하고 정신적으로 건전한 사회로 이행해가려면 사회의 여러 분야들, 그 중에도 무엇보다도 언론, 교육, 종교들이 바로 되어야 한다. “오늘의 종교”(함석헌)가 된 언론의 역할은 그 즉각적인 영향력으로 봐서 막중하다. 4.19 혁명이 가능했던 것도 당시 언론이 그나마 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언론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파행적인 자본주의 첨병과 보수정권의 나팔수가 되어있다. 재벌이나 종단(종교재벌)의 사보 수준이다.
교육은 더구나 정보화시대에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정보의 주입만 일삼고 그것만을 측정하는 입학시험 기술자만 양산하고 있다.

그 기술자들, 철학도 없고 도덕성도 없는 무뇌(無腦) 로봇들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노무현을 죽음으로 인도한 검찰을 보라.) 철학은 사회를 밝히는 밝은(哲) 지혜와 상식을 말한다. 교육은 지식만이 아니라 인성, 사회성, 도덕성을 훈련시키는 과정이어야 하고 입학도 이 네 가지를 고루 측정하는 평가에 의해서 되어야한다. 학교는 세계에 유례없는 높은 비율로 사유화, 기업화 되어간다. 비리대학들은 구 재단으로 하나하나 다시 넘어가고 있다. 도덕성이 없는 이익추구 체제 속에서 교육과 학문연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교육처럼 종교도 급속도로 자본주의화하고 있다. 제2의 종교개혁을 요청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밤에 외국인이 보면 약방인지 묘지인지 알 수 없는 십자가들이 간판처럼 경쟁하듯 밤하늘에 솟아있는 풍경도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이렇듯 끝없이 암중모색해야하는 환경에서 함석헌의 말씀이 다시 상기될 수밖에 없다. 이미 그가 우리사회의 문제, 특히 세 분야(언론, 교육, 종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유업을 계승하고 실천하자고 출발한 집단에도 똑같은 문제가 들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사회가 단순한 개선이나 개혁으로 변화할 것 같지는 않다. 차원이 다른 혁명적 진화가 필요하다. 그것은 민족(성)개조 같은 근원적 혁명/탈바꿈이다.

“역사에서 모든 혁명이 실패하는 까닭은 민족성의 개조에까지 가지 못하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역사상 모든 문제의 근본은 민족에 있다. 역사의 주체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혁명이론은 민족성의 파악에서부터 시작할 것이고, 모든 혁명의 목표는 민족성의 개조에까지 미쳐야 할 것이다.”
(저작집2:44-5)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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