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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저항 교육, 교육 저항, 희망 교육

by anarchopists 2019. 12.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1/16 05: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투명 가방끈”을 선언하는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보다!



“사회는 온통 어지러움이다...... 먼저 할 것은 우리 속에 질서를 잡는 일이다...... 현대의 고민은 결국 새 질서 찾자는 고민, 곧 새 정신 붙잡자는 고민이다...... 그 정신적 질서는 반드시 윤리적인 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그것은 우주의 근본이 윤리적 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가장 깊이, 가장 바르게 파악된 것은 인격적으로 파악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윤(倫)이란 차례란 말이다...... 인간관계는 단순, 일양(一樣)의 것이 아니요, 복잡다양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계를 바로 하려면 일정한 차례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윤리다...... 윤리는 생명적․유기적 통일이다...... 선(善)이란 전체와 전체와의 완전한 조화적인 통일이다(함석헌전집 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341-347쪽).



 
우리나라와 같은 독특한 학벌사회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취직을 앞둔 성인을 위한 직업훈련원으로 전락하거나 상업인문학만이 살아남은 대학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대학은 여전히 진리의 상아탑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진리를 탐구하고 그 진리를 몸으로 살아보겠다는 곳이 대학이라면 대학은 분명 새로운 정신을 생산하는 진리의 요람으로서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계급화되어 있는 대학은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정신을 길어 올려서 성숙한 시민과 교양인을 육성하는 개념의 큰-배움[대학]을 위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이것은 칼 포퍼(Karl R. Popper)가 플라톤의 교육과 양육에 대한 시각을 비판하면서 제기하는 문제에서도 등장한다. “플라톤의 최선국가에서 보조원과 지배계급의 양육이나 교육은 무기휴대와 마찬가지로 계급의 상징이며, 따라서 계급의 특권이다. 양육과 교육은 공허한 상징이 아니라 무기와 같은 지배계급의 도구로, 지배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인간가축을 통솔하고 지배계급을 단합시키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만 양육과 교육은 논의되는 것이다”(Karl R. Popper, 이한구 옮김, 열린사회와 그 적들1, 민음사, 2006, 66쪽). 다시 말해서 교육은 무력을 가진 교육받은 지배자들과 무력도 교육도 없이 지배받는 짐승 같은 인간의 성분(83쪽)뿐만 지배자와 비피배자 사이에 장벽을 쌓는다(247쪽).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대학생들의 새로운 정신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본의 구조 속에서 기업의 생리에 맞추고 재단이 되어 돈의 노예로 살아갈 미래의 노동자들인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그러한 학생들에게 사회를 비판하고 윤리를 논하면서 자신의 삶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형성하도록 하는 것은 한갓 사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학생활 자체와 더불어 여러 가지 스펙을 쌓아야만 하는 청년들에게 대학은 그래도 잠시의 안정을 취하는 휴식처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오늘날 취업도 잘 안 되는 상황을 간파하고 안식이나 휴식을 찾을만한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대학생들은 자신의 처지에 화들짝 놀라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오직 자신의 처지만을 생각하며 세계와 타자를 보지 못하고, 만인을 향해서 무언의 경쟁을 선포하고 오로지 자신을 위한 염려로만 일관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불안감이 그들로 하여금 토익이나 토플, 그리고 기타 자격증 시험대비서 혹은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공무원 수험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4-5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대학생활, 아니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낡은 구습과 질서를 타파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겠다고 온몸으로 저항하고 부르짖는 앳된 학생들을 보니 새로운 씨알의 정신이 움트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몸부림과 목소리가 치기어린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정신을 붙잡고” 자기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겠다는 것이 아닌가. 박수를 쳐주어야 할 일이다. 얼마 전 수능을 보았던 예비 대학생들에게도 고생했다고 격려를 해주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과감한 삶의 용단을 내린 이들의 어깨도 쳐지지 않도록 반드시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같은 씨알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그리고 그 자본의 논리를 잘 반영하고 있는 대학의 정신과 윤리는 전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이익만을 고려한다. 학생들은 대학의 재정적 구조를 튼실하게 해주는 희생양이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 소비자인 학생 고객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고작해야 자본시장에서 자신의 몸값을 잘 올려 받을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짜주고, 대형 강의실에다 집어넣고 형식적인 서비스 교육을 받도록 하면 그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교육이 성숙한 시민을 육성하고 세계와 사회를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도록 만드는 이상적인 인간을 형성한다는 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함석헌은 선(善)이란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것,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학이라는 계급의 쏠림 현상, 엘
리트 교육이라는 불균형 현상, 취직이 잘 되는 공부만 하는 꿈이 없는 인간에게 조화와 균형을 찾으라고 외친다. 그것이 개인적 선이자 사회적 선의 본래적인 모습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함석헌은 ‘내 안의 전체란 한, 일(一), 대(大), 천(天) 등을 정신질서의 핵심으로 삼는 것’이라고 말한다(347-348쪽).


  이제 일반적인 학교교육 자체뿐만 아니라 수능을 거부하고 투명 가방끈을 선언하는 학생들의 수사학을 불온하다고만 하지 말자. 아니 설령 그 학생들의 수사적 언어가 불온하
다 할지라도 우리 사회가 이미 그 불온하고 불손한 질서에 저들을 규격화하려고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이다. 아무도 그 학생들을 나무랄 수 없다. 그 학생들 안에 이미 전체 즉 큰 것, 하늘의 뜻, 온전한 것, 완전한 것을 찾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필자의 마음이 아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도하는 것은 그들 안에서 인생의 큰 뜻을 보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저항이 작은 씨알들의 생명적 꿈틀거림이었다는 것을 만방이 알게 될 날이 있을 거라 믿는다. 필자는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2011/11/16)


*위 사진들은 인터넷 daum에서 가지고 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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