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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자연, 경제적 가치로 따질 수 없다!

by anarchopists 2019. 12.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1/22 05: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종교미학과 생태미학3



“아름다움의 심정은, 감응하는 것이요, 감화하는 것이다...... 예수를 짝하여서 아름다워지지 않은 인격 없다...... 그는 자연을 퍽 가까이하였다...... 그는 놀라운 시인이었다. 자연은 큰 것이요 맑은 것이요 신비로운 것이다. 그는 자연 속에서 그 크고 깊고 맑고 그윽한 것을 벗하고 배우고 맛보며 살았다...... 밤에 자기 혼을 기르기 위해 골짜기, 시냇가, 별 밑에서 명상하고 기도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크고 넓고 깊고 맑고 그윽함이 있다. 참됨이 있고 사랑스럼이 있다. 자연이란 곧 하늘 아버지의 살림 아닌가?...... 자연이 눈에 볼 수 있는 물질로서 하나님의 위대와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면, 그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은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나타난다(함석헌전집 5, 서풍의 노래, 한길사, 1984, 63-66쪽).



 
함석헌에게 있어서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은 곧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느 여름밤에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감탄을 하게 되며, 가을 단풍잎과 은행잎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신비로움 뒤에 더 큰 존재를 어렴풋이 상상해 보기도 한다.


  우리는 그 자연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살았던 인물을 성서의 복음서 속에서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예수이다. 예수는 자연과 벗하며 자연을 노래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마태 6,28-30). 그의 시구(詩句)에 지중해의 바람과 꽃향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면 그가 그렇게 맑고 그윽한 영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자연 안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을 통해서 자신을 보고 세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자연을 닮으려고 하였다.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체험한 그는 자연에서 참됨과 사랑을 깨달았을 것이다. 자연은 살고 있고 살면서 남을 살리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살림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예술미에 대한 자연미의 우위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의 미에 대한 직접적[무매개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한갓 그것을 판정하기 위해 취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항상 선한 영혼의 표지[標識]라는 것과, 만약 이 관심이 습관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자연의 정관[靜觀]과 기꺼이 결합될 때, 그것은 도덕적 감정에 호의적인 마음의 정조[情調]를 가리킨다는 것이다”(KU., B166). 또한 “예술미에 대해 자연미가 갖는 우월성은 자기의 윤리적 감정을 교화한 모든 사람의 순화되고 철저한 사유방식[성향]과 합치한다”(KU., B168)...... “그러므로 자연의 미에 직접적[무매개적]으로 관심을 갖는 이는 적어도 선한 도덕적 마음씨의 소질이 있다고 추정할 이유가 있다”(KU., B169).


  함석헌이 예수에게서 아름다움을 닮은 도덕적 향기를 보았던 것은 그가 자연을 통하여 맑고 그윽함을 간직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자연이야말로 선한 마음과 합치되는 것이고, 인간의 마음을 도덕적으로 순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입장은 별개가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도덕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승화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것은 단지 일신의 건강을 위한 것도 아니요, 노후에 우리의 안락을 위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우리의 인격을 순화시키고 아름다움을 통하여 어떤 존재 그 자체를 상정해 볼 수 있을 만한 존재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만난다. 아니 자연을 통해서 초월자를 만난다. 자연은 인간의 돈벌이 수단을 위한 경제적 가치가 있어서, 또 4대강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강을 파헤치고 거기에다 인간들을 위한 인위적인 공원을 조성하며, 자신의 분신을 자전거 도로를 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존재 이유는 우리의 인격과 도덕을 순화하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러므로 4대강 개발의 목적이 경제 부양이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개발은 자연을 발가벗기는 것이고(de-velop), 그 수치스러움을 다시 시멘트로 가리는 것이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기에서 사람과 자연은 분열이 생긴다. 사람들은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보지 못한다. 물을 바라보지만 이미 물이 아니다. 산을 오르지만 정작 산을 만나지 못한다. 자연을 닮으려고 하나 자연을 마음에 담지 못한다. 마음 따로 자연 따로 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다.


 
자연은 너무 크기에 우리 마음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자연은 맑은 존재이기에 그보다 더 맑은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예수가 괜히 자연 속에서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하며 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았을까?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마음을 갖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러한 마음이 신의 마음이고, 스스로 그러한 마음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도 읽을 수 있다. 자연을 보면 신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자연과 벗할 때 가능한 일이다. 종교가 좀 더 인격적이며 그만한 존재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자연과 벗 삼아 살았던 예수를 닮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종교는 자신의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 생명을 아프게 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림밑천을 축낸다는 말이 아닌가. 건물을 세우는 일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건축을 위해서는 자연은 안중에도 없는 그 무지함과 폭력적인 태도가 문제라는 말이다(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급적 자연 속의 건물이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게다가 그것은 예수의 정신을 이어가는 길이 아니며, 자연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시대에 맞지도 않는 고딕 양식의 교회가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교회도 이제는 자연미를 고려한 생태미학적 디자인을 고려해야 할 시기가 온 거 같다. 더욱이 에너지 위기의 시대에 교회는 지금 생태미학에다 종교미학적 사유를 겸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해야 한다. 따라서 생태미학과 종교미학, 그것은 교회의 형식미와 질료미를 균형 맞추는 사목(목회)의 중요한 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예수와 짝하는 아름다운 인격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2011/11/22).



*위 사진들은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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