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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몸의 성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도덕적 미와 인격이다!

by anarchopists 2019. 12.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1/17 05: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도덕적 감성의 미학자, 칸트와 함석헌1


 
우리 사회가 여러 방면에서 아름다움 즉 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아마도 포스트모던 사회로 접어들면서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 싶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이루면서 사람들은 미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 같다. 패션과 화장, 성형(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취업이라는 난문을 뚫기 위한 면접수단으로도 작용한다), 몸매 관리, 채식 열풍 등은 우리의 몸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가꿀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美, beauty)라는 것은 단순히 몸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아름다움을 포괄해야 한다. 이것은 함석헌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름답다는 것은 ‘앎답’다, 남의 알아 줄 만큼 값이 있단 말이다. 어린이의 살림을 보면 그들의 목표는 실용에 있지 않고 전혀 아름다움에 있다”(함석헌전집 5, 서풍의 노래, 한길사, 1984, 59쪽).


  따라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순수함을 상실하고 퇴색된 실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미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철학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미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실질적인 요소가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원상으로 보면, 미는 라틴어의 벨룸(bellum), 그리스어의 토 칼론(to kalon)에서 온 말이다. 또한 예술을 뜻하는 아트(art)는 고대 라틴어 아르스(ars)와 그리스어의 테크네(techne)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기술 일반을 뜻하는 것으로서 목수업, 외과수술, 코미디, 마술, 건축, 요리, 정치, 처세술, 변론술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가 다양하게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철학자 콜링우드(R. G. Collingwood,  1889-1943)는 미와 예술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도 말했다.


  그럼에도 미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쾌감을 주는 것으로서 감성적 표현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서 미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이다. 이를 토대로 미학의 개조(開祖)인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 1714-1762)은 감성을 이성에 비해 저급한 인식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함석헌은 이렇게 진과 선, 그리고 미를 나누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서풍의 노래, 57쪽)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미의 속알[德], 즉 도덕적 미학을 강조했다. “사람의 마음속에 도덕정신, 그보다도 무한에 대한 종교적 애탐이 없다면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들국이 아름답고 기러기가 아름다웠던 것은 우리 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도덕성 때문이다”(서풍의 노래, 60쪽).


  필자는 함석헌의 이러한 생각에서 칸트(I. Kant, 1724-1804)와 매우 흡사한 미학적 맥락을 만나게 된다. 칸트는 『판단력비
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미적인 것은 윤리적으로[도덕적으로]-좋은[선한] 것의 상징”(das Schoene ist das Symbol des Sittlich-guten)(KU., B258)이라고 말했다. 또한 역학적 숭고미에서도 번개, 천둥, 화산, 폭포와 같은 자연의 위압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나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내적 자아의 도덕심으로 인해서 자연의 두려움에 굴복당하지 않는 감정이 우리 안에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숭고의 감정은 자연 대상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윤리적 존재자인 우리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감정으로 인해서 우리 안에서 생기는 미적 태도인 것이다(KU., §28).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러기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기러기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그 기러기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도덕심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물 혹은 대상을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감성적 인식이기는 하나, 그 대상을 미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 안에 도덕심이나 인격이 없다면, 대상을 그리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칸트나 함석헌의 지론인 셈이다. 이에 함석헌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사람의 인격의 아름다움도 그 사는 자연․사회역사․정신적 체계를 배경으로 삼고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곧 제 한 몸을 소유로만 알 것 아니라,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배경 속에 자기 자신을 놓는 사람인 담에야 위대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다(서풍의 노래,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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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당연히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외모만이 만능이 돼버린 사회, 외모야말로 돈도, 권력도, 명예도, 면죄부도 되는 외모지상주의사회는 그만큼 내면적 깊이는 없으면서 그 외모로 타자 위에 군림하려는 묘한 마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반성 없이 그런 사람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고 추종하려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모두가 순수미가 아닌 실용미 혹은 인공미(인위적인 미)만으로, 내면의 미가 아니라 외형의 미만으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한다. 그러한 생각과 실천에는 역사를, 자연을, 정신을, 사회를 배경으로 자신을 무화(無化)시키려는 인격미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바야흐로 각 가정에서는 본격적인 예비 대학생들이나 예비 취업인의 노고를 치하하고
입학(취업) 선물을 구실로 미를 위한 소․대형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몸매나 얼굴을 고치기 전에 도덕성이나 인격의 아름다움을 위한 사회적 기획, 가정의 성숙한 미감적 태도를 고려해보는 것은 어떨까? 대학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미, 전체의 배경과 하나가 되려는 미, 또 다른 경쟁 시스템 속에서 자기 한 몸만 생각하는 각박한 심성을 기르지 말고 우주와 사회를 배려하는 어우러짐의 미를 구현하려고 노력해보자. 그런 의미에서 "‘잘’ 생긴 혹은 예쁘게 생긴"이 아닌 "올‘바로’ 생긴" 모습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예비 대학생으로서, 예비 사회인으로서의 도덕적 인격을 함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함석헌이 말하듯이, 남이 알아 줄 만큼 값을 더 높이는 길이 아닐까? 언젠가 칸딘스키(W. Kandinsky, 1866-1944)예술의 목적은 새로운 정신의 표현이라고 말을 했는데, 설령 나의 미적 취향이 예술 행위가 아니더라도, 나의 미적 행위가 새로운 정신을 산출하는 표현이나 삶의 이념이 묻어나지 않는 거라면 아름답게 변신하려는 나의 근본적인 속마음을 먼저 살펴야 하리라(2011/11/17).


*위 사진들은 인터넷 daum에서 가지고 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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