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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가을, 생각하니 슬픈 가을이구나!

by anarchopists 2019. 1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1/15 05: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가을이 깊어갑니다...... 성락추풍오장원(星落秋風五丈原), 제갈량이 생각이 납니다...... 그의 일생의 의미는 스스로 눈물로 썼던 출사표의 끝말 한마디로 다 될 것입니다.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后已: 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하다-편집자), 그저 애를 써본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옳은 것을 위해서입니다. 목숨을 받아가지고 나온 이상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 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럼 옳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환한 것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바닥에 있습니다...... 유비라는 이름으로 깃발로 대표된, 이름없는(이름할 수 없이 때문에 이름없습니다) 그 씨알입니다...... 가을이 오면 떨어질 줄 알아야 합니다. 떨어지자 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랄 대로 자라서 갈 곳이 있기 때문에 저절로 떨어집니다...... 생각은 깊어야 합니다. 생각의 불꽃 속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우리 혼은 높은 역사의 탑을 올라갑니다”(함석헌저작집 9,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한길사, 2009, 18-22쪽)



 
비가 내린 후 쌀쌀해진 가을은 이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겨울에게 삶의 의미와 기억들을 넘겨주려고 한다. 가을이 깊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깊다’는 인간 의식의 파편들을 깁고 기워서 마침내 그 깊이를 가늠하는 생각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왜 가을은 늘 생각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가? 낙엽, 떨어지는 것과 가야하는 시간의 막바지를 노랗고 빨간 이파리를 통해서 존재는 비존재(Nichtsein), 즉 무(無)가 되지 않으려는 애씀이 있기에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함석헌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데에다 두고 있다. 옳은 것, 의(義)라고 하는 것 때문에 생각도 하고, 애를 써
본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비존재가 되기 전까지, 이 우주에서 완전히 없는 존재가 될 때까지는 끊임없이 옳음과 그름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방황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각을 깊게 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생생한 깨달음을 통해서 순간순간 옳음이라는 실존적 상황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생각 길잡이의 근원성은 무엇인가? “양심”이다. 양심이라는 실존의 근원적 목소리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방향타 역할을 한다. 그 방향타는 조타수가 쥐고 있다. 양심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실존이 의로운 실존으로 살아가도록 그 실존의 밑바닥에서 방향을 비추어주는 존재가 양심인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바닥에 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빛에 의해서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겸허한 듯이 자신의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는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함석헌은 “씨알”이라고 말한다. 씨알은 진리로서 감추어진 존재가 빛에 의해서 비로소 탈은폐적 존재가, 망각되어진 존재가 기억되는 존재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씨알은 그렇기 때문에 탈은폐가 되기까지는 이름이 없다. 그저 배아의 상태로서 언젠가 커다란 나무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잠재태이자 현실태일 뿐이다. 씨알은 누군가에 의해서 호명되기를 바란다. 호명되어야 씨알이 될 수 있다. 호명은 자신의 정체성과 실존을 확인한다. 그래서 온 우주가 그를 알아주며 저 바닥에서 은폐되거나 망각되지 않고 살아나기
를 이 가을은 바라고 또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씨알은 경제에서, 정치에서, 문화에서, 교육에서, 복지에서, 하물며 먹음이라는 원초적인 영역에서조차도 죽어가고 있다. 씨알은 양심이자 구체적인 실존이며 진리이다. 그런데 사회의 온갖 영역에서 씨알은 이미 존재가 망각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가을이 되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망각되어 버렸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다. 겸손한 씨알은 자
신이 붙어있을 때와 떨어질 때를 금세 알아차린다.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실존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 실존이 생각을 깊게 할수록 세계정신의 탑이 드높이 올라갈 수가 있다. 생각을 깊게 한다는 것은 함석헌이 누누이 강조하는 그의 철학적 토대이자 모토이다. 이 가을에 나 자신이 생각하는 실존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생각에서 세계가 나오고 세계는 생각으로 인해서 올바른 세계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씨알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붙어 있을 세계가 좁아지고 있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씨알이 씨알되기를 거부하는 몸짓도 문제이고 씨알이 씨알의 생각을 하는 것을 기피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씨알의 생각을 접붙일 수 있는 세계, 그리고 겸손하게 자신이 물러갈 때는 아는 세계가 그 씨알을 알아줄 수 있는 것, 즉 세계의(혹은 세계라는) 시선, 세계의(혹은 세계라는) 인식이 환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의 불꽃을 미처 피워보기도 전에 씨알은 이번에도 가을바람 부는 오장원에 별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능(과 같은 환영[幻影]) 세계를 비관하며 그 은폐와 망각이 싫어서 자신의 세계에 붙어있지 못하고 스스로 몸을 던지고 만단 말인가. 갈 곳이 있어서 떨어진 것이 아닐진대 허망하기 그지없다. 언제쯤이나 맘껏 이름을 붙여서 그대들을 호명할 수 있을까? 매년 가을이 되면 생각이 나는 사람들, 그대들은 순수한 씨알이요 진리이어라!





*위 사진들은 인터넷 daum에서 가지고 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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