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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국가의 삶도, 개인의 삶도 미적 판단이 되어야 한다!

by anarchopists 2019. 12.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1/18 06:28]에 발행한 글입니다.

칸트와 함석헌에 있어서 선험적 주관성의 무관심성 미학2


“온 우주를 배경으로 삼아야 정말 아름다운 살림이다. 배경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그 배경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배경 속에 녹아버림이다.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다시 발견함이다”
(함석헌전집 5, 서풍의 노래, 한길사, 1984, 62쪽)
“아름다움은 또 너희 마음에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배경을 밖에 찾는 한은 너희는 헤매고 헤매다가 거친 들에 보기 싫은 구걸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실은 너희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너희 마음밖에 되는 것 없다”(서풍의 노래, 63쪽).



 
우리는 함석헌의 철학적 미학에서 칸트와 같은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의 미학을 엿보게 된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조금이라도 이해관심이 섞여 있는, 미에 대한 판단은 매우 당파적이고 순수한 취미판단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취미의 사안에 있어 심판자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사상(事象)의 실존에 마음이 이끌려서는 안 되고, 이 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관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KU., B6)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오직 이해관심(Interesse)은 도덕 감정과 결부된 쾌 또는 불쾌에만 해당된다(KU., B168-169).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대상은 도덕이나 윤리적 가치 판단
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관심을 완전히 떠나고 대상 그 자체와의 만남을 시도한다면 더욱 자유로운 미적 만족이 생길 수가 있는 것이다. 미적 대상을 소유하거나 계산하려고 하기 보다는 나의 이성적 사유를 중지하고 바라 볼 때 순수한 미가 포착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자칫 미적 대상에 대해서 이해 관심 혹은 사적 관심이 조금이라도 섞이게 된다면, 미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에 편견이 생길 수가 있고 당파적이어서 순수한 미적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KU., B6). 함석헌은 그것을 우주 속에서 자신과 대상이 일치되어 “잊어버림”, “녹아버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주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중지하고 우주를 우주 그 자체로서 바라볼 때 비로소 우주가 우리의 눈앞에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우주를 수단으로 여기거나, 우주를 측정계산하거나, 우주를 산업화하려는 이해 관심은 우주를 미 그 자체로 순전한 직관(혹은 반성)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우주를 무관심적으로 직관할 때, 자기 자신을 볼 수가 있다. 물론 이때에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은 우주를 대상으로 주관 앞에 맞서 있게 하고, 주체인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반성의 의미(미적 판단력은 반성적 판단력이다)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체인 인간이 대상인 우주를 이성(오성)에 의해서 구성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성 능력(직관 능력)으로 우주(대상)를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칸트 이전에는 인간의 인식(직관)이 대상들의 성질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칸트를 ‘선험적 관념론자’라고 부른다.



  함석헌도 아름다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칸트가 ‘미적 대상의 실존에 의
존하지 않고 오히려 미적 대상의 표상을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든다’(KU., B6)고 말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아름다움을 내 마음의 바깥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사방으로 헤매고 미적 대상을 찾으러 다닌다(함석헌의 식으로 말하면 ‘구걸한다’). 그러나 미적 대상은 구걸한다고 해서, 또한 의식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마음)이 대상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 의식 바깥에 있는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법이다. 아름다움이 바깥에서 들어와서 우리 마음에 집어넣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다. 아름답다는 우리 마음 자체 즉 정신이 정한 여러 조건들이 대상에게 맞춰 그 대상 안으로 집어넣어서 아름답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야말로 입법적이요 규제적이 되는 것이다.


탁월한 교육학자이자 철학자인 볼노브(Otto F. Bollow)의 말은 이러한 칸트와 함석헌의 논조를 잘 나타내준다. “예술은 비로소 사람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가르쳐 준다. 우선 좁은 의미에서 “본다”는 말의 뜻을 시각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생각해 보자. 만약에 우리들이 눈만 뜨면 언제나 자유롭고 순수하게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과오인 것이다. 일상생활에 있어 우리들은 항상 실질적 욕구에 매여서만 “물체”의 세계를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욕구 때문에 “물체”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들의 용도에 따른 이용가치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물체” 자체의 순수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우리들의 이 욕구적인 면에서 해방되어야만 그 “물체”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기욕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다는 일은 일상생활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며 또한 가능하다 할지라도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예술의 과제이며, 특히 시(詩)가 해야 할 과제이다”(Otto F. Bollow, 한국철학회 편, 이규호 옮김, 법문사, 1967, 23-24쪽).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이익 혹은 이해 관심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더 나아가서 우주와 자연, 그리고 한갓 대상이 인간의 욕구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것으로 인식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정치가, 경제인(경제전문가), 기
업인, 군인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 심지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조차도 모든 사람들이 앞에서 두 철학자들이 말한 심미적인 눈을 기른다면 나와 세계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각자가 아름다움 마음이 되어야 세계가 아름다워진다는 단순한 논리는 철학자들의 탁견만이 아니다. 다만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을 먼저 깨우쳤을 뿐이다. 지금 한미 FTA, 월가 점령 시위, 서해안 일대의 중국 불법 조업, 지방자치단체의 혈세 낭비, 홍수로 얼룩진 태국 등 국내외 문제가 심각하다. 이럴수록 아름다운 마음, 즉 무관심의 관심(Interesse der Interesselosigkeit)이 필요하지 않을까?(2011/11/18)



*위 사진들은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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