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5/06 12:59]에 발행한 글입니다.
수많은 길이 있다. 사실 길 없는 곳이 없다. 다닌 길은 나닐 길이고 나닐 길은 계속 다닐 길이다. 그러나 길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 다닌 길을, 간 길을 가려고 한다. 자국이 남은 길이 편하고 안심을 할 뿐만 아니라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 길이 아니다. 아닌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갔기 때문에 길이 생겼을 뿐이다.
길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내는 것이다. 반드시 참 길, 삶의 길, 다님 길을 내야 한다. 내가 내야 비로소 길이 된다. 다닌 길을 가는 길은 진리/참 길이 아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야 한다. 가야 할 목적지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함석헌은 “길이 참이다. 기르는 것이 참이다. 갈 길 있는 것 아니다. 감이 길이다.”(위의 책, 165쪽)라고 말한다. 가고 감. 가는 것은 삶을 감는다, 마음을 감는다는 것이다. 가는 것은 감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삶을 감고, 마음을 감기 위해서 길을 가지 않는다. 오직 남이 낸 길을 따라 똑같은 흔적을 남기려고 할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길이 나지 않는다. 새로운 길이 나야 새로운 삶이 열린다. 새로운 길을 가야 새로운 씨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길은 기르는 것이다. 나를 기르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같은 길이 아닌 늘 다른 길이다. 길은 늘 거기에 있지만 그 길을 가는 나는 다른 시간 다른 길을 만난다. 길의 신비, 길의 진리는 현상을 넘어 우리를 이끄는 세계를 지시한다. 길은 있음이지만 반드시 가야 있는 것이다. 길의 형이상학은 넘어선-곳, 넘어서-있는-곳에 새로운 나를 놓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길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갖는다. 새로운 존재는 시간성을 나타내지만, 넘어서-있는-곳, 혹은 넘어서-있을-곳은 공간성이다. 넘어서-있는-곳은 다시 너머에-있는-곳이다.
길은 ‘너머’가 없다면 ‘넘어’는 무의미하다. 의미 없는 넘어의 길은 의식과 행위의 불가능성을 낳지만, 길과 너머는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원인체이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항상 넘어서, 너머에-있는-곳을 향해 간다. 길의 형이상학은 너머의 존재를 해명하려 한다. 그것은 길을 가는 자가 향해-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향해-있음의 존재는 향해-있는 존재의 본질이 향해야-할-곳을 본다. 지금 향해-있는-곳으로부터 향해야-할-곳, 즉 너머에-있는-곳으로 향해 가려고 한다. 정부가 KTX를 민영화하겠다고 한다. 민자 유치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었던 말인가? 씨의 고통은 어쩌려고 하는 것일까. 청계광장에는 미국산 수입쇠고기 반대, 총선부정, 원전반대 촛불시위가 일고 있다. 국가 정치경제는 이미 낸 길을 날 길로 바꾸려 함인지, 아니면 낸 길을 새로운 길로 하겠다는 것인지, 씨알은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씨알은 난 길을 낼 길로 알고 자기의 길인 양 가고 말 것이다.
길은 길기 때문에 아무도 지레짐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야 비로소 길을 알 뿐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간다. 길을 가기 전, 길을 가는 도상이라도 그 길이 참 길인지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현재 향해-있는-곳에서 과연 향해야-할-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인지를 자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로 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자신의 길을 내라!
길은 멈춘 적이 없다. 길이 길 아닌 적도 없다. 길은 사람과 함께 존재해왔기에, 길은 사람의 고향이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그래서 길은 지나감이요 지나가야 할 길인 것이다. 스스로 길을 내고 살아야 하는 살아감의 길, 즉 삶의 길이다. 길을 내지 않아도 길은 길이다. 길은 선험적이고 초월적이다. 함석헌이 “사람이 길을 낸 것 아니요, 길을 걷는 것도 아니요, 도리어 길에 떨어진 한 알이 사람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165쪽)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수많은 길이 있다. 사실 길 없는 곳이 없다. 다닌 길은 나닐 길이고 나닐 길은 계속 다닐 길이다. 그러나 길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 다닌 길을, 간 길을 가려고 한다. 자국이 남은 길이 편하고 안심을 할 뿐만 아니라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 길이 아니다. 아닌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갔기 때문에 길이 생겼을 뿐이다.
길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내는 것이다. 반드시 참 길, 삶의 길, 다님 길을 내야 한다. 내가 내야 비로소 길이 된다. 다닌 길을 가는 길은 진리/참 길이 아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야 한다. 가야 할 목적지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함석헌은 “길이 참이다. 기르는 것이 참이다. 갈 길 있는 것 아니다. 감이 길이다.”(위의 책, 165쪽)라고 말한다. 가고 감. 가는 것은 삶을 감는다, 마음을 감는다는 것이다. 가는 것은 감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삶을 감고, 마음을 감기 위해서 길을 가지 않는다. 오직 남이 낸 길을 따라 똑같은 흔적을 남기려고 할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길이 나지 않는다. 새로운 길이 나야 새로운 삶이 열린다. 새로운 길을 가야 새로운 씨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길은 기르는 것이다. 나를 기르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같은 길이 아닌 늘 다른 길이다. 길은 늘 거기에 있지만 그 길을 가는 나는 다른 시간 다른 길을 만난다. 길의 신비, 길의 진리는 현상을 넘어 우리를 이끄는 세계를 지시한다. 길은 있음이지만 반드시 가야 있는 것이다. 길의 형이상학은 넘어선-곳, 넘어서-있는-곳에 새로운 나를 놓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길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갖는다. 새로운 존재는 시간성을 나타내지만, 넘어서-있는-곳, 혹은 넘어서-있을-곳은 공간성이다. 넘어서-있는-곳은 다시 너머에-있는-곳이다.
길은 ‘너머’가 없다면 ‘넘어’는 무의미하다. 의미 없는 넘어의 길은 의식과 행위의 불가능성을 낳지만, 길과 너머는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원인체이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항상 넘어서, 너머에-있는-곳을 향해 간다. 길의 형이상학은 너머의 존재를 해명하려 한다. 그것은 길을 가는 자가 향해-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향해-있음의 존재는 향해-있는 존재의 본질이 향해야-할-곳을 본다. 지금 향해-있는-곳으로부터 향해야-할-곳, 즉 너머에-있는-곳으로 향해 가려고 한다. 정부가 KTX를 민영화하겠다고 한다. 민자 유치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었던 말인가? 씨의 고통은 어쩌려고 하는 것일까. 청계광장에는 미국산 수입쇠고기 반대, 총선부정, 원전반대 촛불시위가 일고 있다. 국가 정치경제는 이미 낸 길을 날 길로 바꾸려 함인지, 아니면 낸 길을 새로운 길로 하겠다는 것인지, 씨알은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씨알은 난 길을 낼 길로 알고 자기의 길인 양 가고 말 것이다.
길은 길기 때문에 아무도 지레짐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야 비로소 길을 알 뿐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간다. 길을 가기 전, 길을 가는 도상이라도 그 길이 참 길인지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현재 향해-있는-곳에서 과연 향해야-할-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인지를 자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로 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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