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9/26 07:24]에 발행한 글입니다.
지난 12일부터 사흘간 일정으로 친일파 관계 자료를 살펴보고자 중국 연변지역을 다녀왔다. 저녁에는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도 만나보고 대화도 나누었다. 그 중 친일파에 대한 연구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 한 노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이들과의 이야기를 가지고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한국사의 훼손’이 우려된다. 고구려역사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처음에 연변의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다가 점차 그들의 생각을 내놓았다. 한중 개방초기에 연변 조선족 학자나 인민들은 자신들을 경계인(또는 邊際人)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중국국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들은 고구려역사에 대하여 중국인이라고 해서 중국 입장을 대변할 수도 없고, 혈통이 한인(韓人)이라고 해서 한국을 편들 수도 없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고구려 문제는 한국정부와 한국인이 자초한 일이라고 원망한다.
그 이유는 “연변을 방문하거나 관광하는 한국인들이 마치 백두산이 한국 것인 양 떠들었고, 반 미친 종교인들이 중국에서는 금기시 하는 종교의식을 백두산에서 마구 행하였다.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자기 조상이나 인척의 무덤에 한국식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놓음으로서 한국의 상장풍습을 중국에 이식시켰다. 또 통일이 되면 우리 땅을 되찾겠다는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다 돈 있는 자들은 이곳에 고급빌라와 빌딩을 짓고 아파트를 사두면 언젠가 우리 땅이 되었을 때 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허무맹랑한 짓거리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무분별한 한국인의 짓거리가 중국을 자극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중국은 만약 남한과 북조선이 합심하여 을사조약의 불법과 이에 근거한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만주지역의 영토문제를 제기해 오면 난처하리라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으로서는 이참에 연변을 포함하는 만주(중국에서는 동북이라 함)지역을 확실한 중국영토로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공안당국에서 이러한 한국인의 지나친 생각과 행동에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일환으로 나온 조치가 ‘고조선역사 왜곡’과 ‘고구려역사 왜곡’(중국에서는 ‘동복공정’이라 함)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국정부와 한국인을 나무라는 말들을 한다. 이곳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정부에서 조금이라도 ‘영토문제로 중국을 자극하지 말 것’, ‘조선족에게 경제적 위축감을 유발시키는 언행을 삼가 할 것’, ‘중국의 사회체제를 존중해 줄 것’ 등 성숙된 여행태도를 사전교육해서 중국에 보내기만 했더라도 지금 이렇게 ‘역사감정’으로 이 지역의 같은 동포들이 곤란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고뇌를 토로한다. 그리고 이곳 연변조선족은 경계인으로서 “앞으로 절대 ‘고구려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라고, 그들의 아픔도 덧붙여 말한다.
한편 이들 연변사회 지식인들은 “이제 연변조선족은 한국이나 북조선과도 다른 또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독립된 사회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입증이나 해주듯 중국당국으로부터 연변대학은 조선족의 역사를 독립하여 연구하도록 학문적 지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코 한국사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조선족의 역사’도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하면서 ‘한국사의 일제시대사’에서도 떨어져 나가는 꼴이 된다. 다시 말하면 중국 입장에서 보면 만주지역에서 반일세력의 민족해방운동은 만주로 이주해온 ‘조선족의 항일역사’이지, ‘한국인의 항일운동사’가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 되면 만주나 중국관내에서 한국인의 항일투쟁과 무장독립운동은 한국사의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사’가 아니게 된다. 잘못하면 고구려역사와 함께 일제시대, 만주의 항일투쟁사도 ‘한국사의 미아’가 되는 비극이 올 수 있다.
한국인과 연변조선족의 관계도 이제는 남남이 되었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개방하였을 때만 해도 연변조선족은 ‘잘 살고 있는 같은 동포가 있다’는 긍지에서 한국에 걸었던 기대치가 컸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북조선에게 느꼈던 동족의식과 민족감정이 한국으로 쏠리고 “우리 동포에 남한도 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긍심을 가지고 남한 동포를 받아들이고 남한에 들어가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변에 들어왔든 한국에 있든 어떤 한국인도 연변조선족을 ‘예속인’ 취급하듯 하였다. 그 결과는 실망으로 왔다. “남한은 더 이상 우리 동포가 아니다.” 이것이 연변조선족들에게 ‘한국동포’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중국국민’이라는 인식을 굳게 심어주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노교수도 “이제는 한국인과 연변조선족은 다른 공동체다” 이제 “우리는 각각 다른 국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끝으로 연변의 학자들은 한국 정부에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국은 인재를 버리지만, 연변은 인재를 버리지 않는다.”, “지금 한국정부는 엄청나게 양산된 박사급 고급인력을 외면하고 마구 버리고 있다. 자본주의 한국에서 한 개인이 박사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고, 꽃다운 청춘을 바쳐가며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남다른 노력을 해서 박사가 되면 무엇 하는가, 국가와 사회로부터 마구 버려지고 있지 않는가. 그 인재들이 갈 곳이 없어서 가엽게도 ‘상아탑의 파출부’ 로 연명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의 음식점에서 잡부로 일하는 연변조선족 여인의 경제가치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 있지 않는가. 이게 과연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대한민국 정부가 할 짓인가” 라고 꼬집는다.
만약 한국이 인재를 방치하는 정책을 계속한다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고. 그리고 한국인들은 더 이상 연변을 망가트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충고도 해왔다. 지금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이 연변의 녹지에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아파트와 빌라를 짓고 자기들만의 호화로운 영역(용산 미군기지처럼 빌라지역에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을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족과 한국인의 또 다른 위화감을 조성하는 꼴이 된다고 안타까워한다. 또 그 노교수는 말을 잇는다.
“중국은 사회주의체제로 직행함으로써 자본적 계급사회를 뛰어넘어 인민적 평균사회로 돌입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주의식 시장경제’라는 개방사회로 가면서 평균적 사회가 파괴되고 계급사회로 다시 역류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연변 사람들은 ‘상류사회로 가는 길은 돈을 버는 길이다’라고 생각하여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조선족들은 지금까지 인간의 정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그 정이 메말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연변에는 미래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국에는 정신적 스승이 없었지만 연변에는 정신적 스승이 많기 때문이란다.” 결국 연변조선족과 한국인은 개방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동포를 또 하나 잊어버렸다는 애석한 느낌이 들었다. (2004. 7.16, 초고, 2010. 9 26 정리/ 취래원농부)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연변의 노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조선족은 한국의 동포가 아니다. 중국국민이다-
지난 12일부터 사흘간 일정으로 친일파 관계 자료를 살펴보고자 중국 연변지역을 다녀왔다. 저녁에는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도 만나보고 대화도 나누었다. 그 중 친일파에 대한 연구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 한 노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이들과의 이야기를 가지고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연변을 방문하거나 관광하는 한국인들이 마치 백두산이 한국 것인 양 떠들었고, 반 미친 종교인들이 중국에서는 금기시 하는 종교의식을 백두산에서 마구 행하였다.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자기 조상이나 인척의 무덤에 한국식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놓음으로서 한국의 상장풍습을 중국에 이식시켰다. 또 통일이 되면 우리 땅을 되찾겠다는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다 돈 있는 자들은 이곳에 고급빌라와 빌딩을 짓고 아파트를 사두면 언젠가 우리 땅이 되었을 때 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허무맹랑한 짓거리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무분별한 한국인의 짓거리가 중국을 자극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중국은 만약 남한과 북조선이 합심하여 을사조약의 불법과 이에 근거한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만주지역의 영토문제를 제기해 오면 난처하리라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으로서는 이참에 연변을 포함하는 만주(중국에서는 동북이라 함)지역을 확실한 중국영토로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공안당국에서 이러한 한국인의 지나친 생각과 행동에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일환으로 나온 조치가 ‘고조선역사 왜곡’과 ‘고구려역사 왜곡’(중국에서는 ‘동복공정’이라 함)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국정부와 한국인을 나무라는 말들을 한다. 이곳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정부에서 조금이라도 ‘영토문제로 중국을 자극하지 말 것’, ‘조선족에게 경제적 위축감을 유발시키는 언행을 삼가 할 것’, ‘중국의 사회체제를 존중해 줄 것’ 등 성숙된 여행태도를 사전교육해서 중국에 보내기만 했더라도 지금 이렇게 ‘역사감정’으로 이 지역의 같은 동포들이 곤란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고뇌를 토로한다. 그리고 이곳 연변조선족은 경계인으로서 “앞으로 절대 ‘고구려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라고, 그들의 아픔도 덧붙여 말한다.
한편 이들 연변사회 지식인들은 “이제 연변조선족은 한국이나 북조선과도 다른 또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독립된 사회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입증이나 해주듯 중국당국으로부터 연변대학은 조선족의 역사를 독립하여 연구하도록 학문적 지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코 한국사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조선족의 역사’도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하면서 ‘한국사의 일제시대사’에서도 떨어져 나가는 꼴이 된다. 다시 말하면 중국 입장에서 보면 만주지역에서 반일세력의 민족해방운동은 만주로 이주해온 ‘조선족의 항일역사’이지, ‘한국인의 항일운동사’가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 되면 만주나 중국관내에서 한국인의 항일투쟁과 무장독립운동은 한국사의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사’가 아니게 된다. 잘못하면 고구려역사와 함께 일제시대, 만주의 항일투쟁사도 ‘한국사의 미아’가 되는 비극이 올 수 있다.
한국인과 연변조선족의 관계도 이제는 남남이 되었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개방하였을 때만 해도 연변조선족은 ‘잘 살고 있는 같은 동포가 있다’는 긍지에서 한국에 걸었던 기대치가 컸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북조선에게 느꼈던 동족의식과 민족감정이 한국으로 쏠리고 “우리 동포에 남한도 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긍심을 가지고 남한 동포를 받아들이고 남한에 들어가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변에 들어왔든 한국에 있든 어떤 한국인도 연변조선족을 ‘예속인’ 취급하듯 하였다. 그 결과는 실망으로 왔다. “남한은 더 이상 우리 동포가 아니다.” 이것이 연변조선족들에게 ‘한국동포’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중국국민’이라는 인식을 굳게 심어주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노교수도 “이제는 한국인과 연변조선족은 다른 공동체다” 이제 “우리는 각각 다른 국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만약 한국이 인재를 방치하는 정책을 계속한다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고. 그리고 한국인들은 더 이상 연변을 망가트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충고도 해왔다. 지금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이 연변의 녹지에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아파트와 빌라를 짓고 자기들만의 호화로운 영역(용산 미군기지처럼 빌라지역에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을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족과 한국인의 또 다른 위화감을 조성하는 꼴이 된다고 안타까워한다. 또 그 노교수는 말을 잇는다.
“중국은 사회주의체제로 직행함으로써 자본적 계급사회를 뛰어넘어 인민적 평균사회로 돌입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주의식 시장경제’라는 개방사회로 가면서 평균적 사회가 파괴되고 계급사회로 다시 역류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연변 사람들은 ‘상류사회로 가는 길은 돈을 버는 길이다’라고 생각하여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조선족들은 지금까지 인간의 정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그 정이 메말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연변에는 미래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국에는 정신적 스승이 없었지만 연변에는 정신적 스승이 많기 때문이란다.” 결국 연변조선족과 한국인은 개방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동포를 또 하나 잊어버렸다는 애석한 느낌이 들었다. (2004. 7.16, 초고, 2010. 9 26 정리/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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