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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인, 어질게 사는 근본을 깨우칩시다!

by anarchopists 2019. 11.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2/2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눈으로 해석하는 동양철학]


논어(論語)의 중심 사상(思想)들

1. 인의 개념


  인(仁)이란 說文解字에 따르면, 사람(人)과 둘 이(二)로 풀이된다. 이는 인이 무릇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공자의 인 사상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세계에 그 뜻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어떻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이르는 인의 수사학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공자의 인(혹은 仁學)은 인본주의(人本主義)다.

제일 먼저 인은 부모와 자식과의 가족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제자는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하며 삼가고 미덥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과 친해야 한다.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운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問). 인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먼저 효도하는 자는 바깥에서도 그 몸가짐이 예로써 드러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인에서 효를 강조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忠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되 부모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汎愛衆), 그것이 인하는 마음이다.

또한 언행과 얼굴 표정을 조신하게 해야 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자(仁者)는 말에 있어서 진솔하며 얼굴빛에 있어서도 꾸밈이 없어야 한다(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얼굴빛은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속일 수 있지만, 얼굴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 인자가 지녀야 하는 덕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表裏不同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타인에게 건네는 것은 인자의 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짚어 주고 있다.

인자가 얼마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지키는가를 보여주는 말이 있다. “오직 인자여야 사람을 좋아하며,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惟仁者能好人 能惡人). 인한 사람은 도리를 알기 때문에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사람을 좋아할 수도 또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 흔히 어떻게 인자가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눈으로 보면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한(혹은 여러) 요소가 보이는 것이다. 사랑을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감정으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심성으로 보는 데에도 공자의 인의 철학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인의 바탕은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사람이다. 「술이편」(述而篇)에 보면,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인은 멀리 있는 것인가? 내가 인을 하고자 하면 인은 곧 나에게로 온다”(人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인은 나에게서 비롯된다. 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발현하여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면 누구나 인하는 마음을 다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외현(外現)으로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인 혹은 사랑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이 인하는 마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타자에 대한 배려와 자비로 나타난다. 즉,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실천에 이르기까지 두루 펼쳐진다. 특히 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언행과 외형을 모두 잘 조화를 이루어 표리부동하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다.

2. 천명사상

 
공자는 인본주의 사상가이다. 그는 신과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물론 그가 종교를 자신의 담론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에는 정치적 담론을 통한 인의 뿌리내림에 더 관심이 깊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가 마치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논리에 따랐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인은 인간 삶의 도덕적․윤리적 초점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의롭게 만드는 데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지혜(智)라고 할 수 있다”(子曰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는 말로 미루어 보아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나서 종교를 논하든, 신을 논함이 마땅하다. 이는 공자가 괴이한 것, 힘센 것, 어지러운 것, (귀)신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述而/20 子不語怪力亂神)는 종교적 견해를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공자가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최종 편집자가 논어를 집필하면서 가감, 삭제, 수정했을 가능성, 즉 자신의 논지와 편집 방향대로 맞추다 보니 크게 강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공자의 철학 자체가 사람과 삶에 토대를 두고 ‘인’의 실체론과 관계론을 강조했을 것이다. 진정한 종교는 하늘에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섬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현재적 존재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생생하게 드러나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은 죽은 존재 혹은 신과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과의 문제에 더 현안점을 두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3. 정치사상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가 신하다워야 한다(雍也/23 子曰觚不觚 觚哉觚哉). 그런데 그 ‘다움’에는 각 지위에 중심된 마음 자제가 있다. 임금은 아랫사람을 부릴 때에 ‘禮’로써 해야 하고, 아랫사람은 충성으로 섬겨야 한다(八佾篇 19, 定公問 君使臣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윗사람으로서의 정치적 태도와 자세, 아랫사람으로서의 정치적 처신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爲政篇 1에서는 “정치하기를 덕으로써 하는 것은 비유하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모든 별들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참고 爲政/3)고 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덕으로써 정치를 베푼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를 것이다. 마치 북극성처럼 말이다.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게 하는 힘은 덕에서 나오는 도덕정치의 힘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정치는 도덕정치이다. 덕을 통해 임금과 백성이 서로 교감한다. 임금이 덕을 통해 나라를 다스려야 거기서 바른 정치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가 바로 서야만 한다(政=正). 임금에게는 ‘禮’가 필요하고, 신하에게는 오로지 ‘忠’으로 임금을 섬겨야 한다. 이 모든 것이 德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도덕정치의 힘에서 비롯된다. 임금은 움직이지 않는 듯해도 그가 德이 있기 때문에 백성이 편안해하고 백성이 임금을 우러른다.

4. 예악사상

 
학이편 12에 “예의 사용에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귀하다. 선왕의 도가 모두 아름답다 하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이 다 이 조화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만 알고 화에 치우쳐 예로써 조절하지 않으면 이 또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라고 했다. 논어에서 예라는 것은 자연적 성격이 아니라 인위적 형식이다. 그러나 이 예는 하늘의 이치를 딴 규범이다. 그런데 예는 자연의 이치인 和를 지향한다.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예의 사용에 조화가 귀중한 것이듯이, 화 또한 예에 의해 조절되고 절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악(樂)은 조화의 절정이다. 조화를 잃은 음악은 절제가 무너진 것이고 그것은 방탕으로 흘러갈 수가 있다. 사람들의 관계도 너무 예에 집중이 되어서 절제에 치중한다면 사람들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화를 지향하되 예로써 절제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 형식에 치우친 예를 통해서 절제만 한다면 사람이 경직되기 쉽다. 악은 조화를 통해서 인간이 지닌 성정을 풀어준다. 그러나 조화도 지나치면 방탕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로써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5. 학문사상

「위정편」(爲政篇)에는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爲政/17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是知也)는 말이 등장한다. 학문은 나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움이 시작된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깨우친다는 것이 어디 쉬운가. 평생의 배우는 자의 수양일 것이다. 우리의 모르는 것이 그칠 때 학문하는 것도 그친다. 그러니 학문은 끝이 없다. 우리의 무지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논어의 첫머리는 항상 우리의 배움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묵묵하게 기억하고, 배우고서 싫증내지 아니하며, 남에게 깨우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이 외에) 나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述而/2, 子曰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배움이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을 깨우쳐 줄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열린 마음에서 비롯된다. 또한 배움을 통한 때때로 익힘과 그 즐거움을 통해 지속적으로 남을 계몽하는 것도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 학문이 나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나의 배움이 나의 무지의 깨우침의 시작이고 보면 함께 타자를 통한 배움이 더 깊어질수록 학문은 지칠 줄 모르는 수양으로 접어들게 된다.

“먼저 시를 배우고 예로써 입신하고 음악에서 완성할 것이다”(泰伯/8,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학문은 修身이다. 몸과 마음을 닦기 위해서 맨 처음 시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예를 배워서 악으로 완성해야 한다. 예는 몸과 마음을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 악은 五聲과 十二律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사람의 성정을 길러주며 마음의 사악함을 제거해준다. 예의 귀결이 악이라고 했다. 절제와 조화를 통해 학문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조화로운 악을 통해 인할 수 있는 마음, 인의 실천에 이를 수 있는 마음, 도덕적으로 원만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 준다. 학문은 곧 인의 실현을 위해 존재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인하는 마음을 요동치게 하며 그것이 인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게 작용하는 원동력이다. 학문하는 자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되 인의 자각에 힘써야 하는데 그 기반이 학문, 즉 수신이다. 이로써 학문을 통한 인은 사람의 내면에서 發顯하고 外現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6. 도덕사상

 
<學而篇>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제 때에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도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아니하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모름지기 여기서 군자란 ‘도덕적인 사람’을 말한다. 도덕적인 사람은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명확히 알아야 하며,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오히려 근신하며 자신을 수양하면서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군자이다.


  <인의 개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자는 표리부동하여 마음과 얼굴빛이 달라서 타인을 혼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사람, 즉 군자도 文質彬彬하여야 한다. 외관과 내면의 마음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악(文)이 세련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文이 도덕성에 근본을 두어야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도덕적인 인간은 늘 덕을 추구하기 때문에 소인처럼 현실의 이익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갈 때와 나올 때를 구분할 줄 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군자는 외형과 내면을 조화롭게 할 줄 알아야 한다.

*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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