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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단상

이 나라 여성이라는 존재, 그저 희생양인가.

by anarchopists 2019. 11.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2/0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 여사의 송년회

어느 덧 연말이다. 사람들마다 달력에 표시된 일정표를 보고 한숨을 쉰다. 오늘도 내일도 뱀꼬리처럼 이어지는 송년회에 얼굴을 내밀어야할지 어쩔지 고민 중이다. 직장인들에게 송년회는 일의 연장선일 경우가 많다.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자리가 아닌 술을 못 마셔도, 내일 죽을 만큼 몸이 괴로워도 술독에 빠졌다 나와야 하는 자리. 그래서 직장인들은 어서 한 해가 지나가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

연말 모임이 많은 건, 평범한 주부인 김 여사도 마찬가지다. 오늘 따라 김 여사의 얼굴이 장마 끝에 비추는 햇살처럼 화사하다. 평소에는 5분이면 끝나던 화장도 오늘은 족히 50분은 거울 앞에 서 있다. 아이라인을 그리는 손길이 가볍게 떨린다. 온 정성 들여 주름진 얼굴을 감추느라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힌다. 화장이 끝난 후,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데도 적잖이 신경이 쓰인다. 작년에 입고 나간 옷을 입을까 내심 걱정이다. 다행히 며칠 전 모임에 나가기 위해 새로 구입한 옷이 눈에 띈다. 새 옷과 새 구두를 신은 김 여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문을 나선다.

왁자지껄. 어느 덧 모임 장소로 얻어 놓은 룸은 물론 노래방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놓은 대형 음식점에는 이미 동창들이 나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김 여사가 들어서자 이산가족을 만나기라도 한 듯 친구들이 반긴다. 이 맛에 김 여사는 시댁 경조사는 빠져도 절대 동창회는 빠지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남자 동창들과 춤을 추며 놀다 보니 어느 덧 새벽녘이다. 동창 모두 술에 취해, 덜 깬 여흥에 젖어 흐느적거리며 새벽까지 문을 연 술집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김 여사는 나이 오십이 넘도록 가정만 지키던 현모양처였다.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들 둘 알뜰살뜰 키우며 사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아니 솔직히 말해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를 순진무구한 아낙으로 그냥 놔두지 않았다. 즐거운 일들이 널린 세상에 왜 집안에만 처 박혀 사는 바보가 됐냐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면서 시작된 김 여사의 외도는 폭우에 물 불어 난 도랑처럼 차고 넘쳤다. 가정 안에서 느꼈던 답답함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는 유혹의 덫은 어디든 널려 있었다. 동창회, 향우회, 계모임, 등산모임, 훌라 댄스 모임, 식도락가 모임 등등....

누군가 간절히 부르지 않아도 김 여사는 매일 집을 비워야할 만큼 바빴다. 처음에는 낯선 자리도 몇 번 나가면 금방 친밀감을 느꼈다. 세상사는 참맛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유혹의 손길은 질기고도 감미롭게 그녀 곁을 맴돌았다. 김 여사는 조금씩 밤 문화에 빠져 들게 되었다. 산에 갔던 무리들끼리 내려 와 뒷풀이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 올 때가 많았고, 춤을 배우면서부터 카바레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생각지도 못했던 쾌락의 절정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요즘 김 여사는 각종 모임의 송년회에 쫓아다니느라 바쁘다. 밤마다 술에 취해, 남자에 취해 흐느적거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김 여사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집안 장롱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이고 가족들의 가슴 속에는 분노가 쌓여 갔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만큼 위태해 보이는 김 여사의 연말이다.

지금까지 쓴 글은 소설을 쓰기 위한 시놉시스(synopsis)가 아니다.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모범적인 주부였던 김 여사의 변신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는 분명 고등 교육을 받았고 남편 역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김 여사가 하루아침에 일탈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사회 전반적으로 깔린 여성에 대한 편견도 한 몫을 했다고 본다. 여자는 그냥 여자일 뿐이라는 생각. 특히 결혼한 여자는 ‘믹서된 인간’으로만 보는 시선 말이다. 그 여자가 예전에 무엇을 했든, 어떤 특성을 갖고 있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적이면 족했다. 현모양처라는 잣대로 모든 여자를 판단했다. 그런 면에서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왠지 모를 죄책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살림만 하던 여성들을 대단하게 여겼던가. 그것 또한 아니었다. 양쪽 다 이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가슴으로 피를 흘리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중년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집 안의 화초처럼 조용하던 주부들의 반란이 일부는 김 여사처럼 탈선의 길을 가는 경우를 보면서, 그 또한 사회 문제 대부분이 그렇듯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아픔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여성의 탈선은 지금 이혼 위기에 놓인 김 여사처럼 ‘건널 수 없는 강’이 되고 말 때가 많다. 남자의 일탈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여성은 아주 냉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다시 연말연시다. 여기저기서 송년회 등이 열리고 있다. 김 여사처럼 답답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고픈 마음에 모임에 나갔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 송년회가 더는 망하길 작정한 사람들처럼 흥청거리는 모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눈길로 가족과 함께 올 한 해 좋았던 일과 아쉬운 일들을 나누며 내년을 설계하는 조촐한 자리였으면 좋겠다. 김 여사가 가정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비는 마음과 함께.(2011. 12.7, 박경희)

박경희 작가님은
2006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한국방송 라디오부문 작가상을 수상했다. 전에는 극동방송에서 "김혜자와 차 한잔을" 프로의 구성 작가로 18년 간 일하다 지금은 탈북대안학교 '하늘꿈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의 필진이다.

작품으로는 《분홍벽돌집》(다른, 2009), 《이대로 감사합니다》(두란노, 2008),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 2006),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평단문화사, 2004)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아래 사진은 탄천뉴스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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