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단상

기독창당, 목사님 똥물에 들어가지 마세요

by anarchopists 2019. 12. 1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9/21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목사님, 착한 성도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지 마세요. 제발!

내 유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언덕 위의 작은 교회’가 떠오른다. 산딸기나무에 종아리를 긁히면서도 산 넘고 물 건너 예배당에 가는 시간이 즐거웠다. 거기엔 나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처럼 흰 수염이 무성 했던 목사님으로부터 예배당 종을 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새까만 계집아이는 종소리 속에서 꿈을 키워왔다.

“뎅그렁! 뎅그렁~”

산간벽지 시골 마을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단순한 종소리만은 아니었다. 때를 알려 주는 시계 역할은 물론, 허리 한번 맘껏 펴지 못하고 일하는 농부들에게는 쉼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모두가 가난한 시대였기에 목사님의 삶이 궁핍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일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분은 진정 성자였다. 단 한 벌 뿐인 낡은 양복, 구멍 난 양말을 몇 겹으로 꿰매어 신은 모습, 싸구려 구두가 전부임에도 목사님의 눈빛은 늘 형형했다. 한 번도 새 옷을 입은 적이 없지만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목사님은 동네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종교와 상관없이 발 벗고 나섰다. 돈이 없으면 교회 주방에 있던 설탕이라도 갖다 주었다. 어쩌다 교인들이 갖다 준 뇌물(그래봤자 쌀 한 말 정도)도 홀로 사시는 할머니 댁에 몰래 전하곤 했다. 철모르는 나였지만 그런 목사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일 거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목회자를 일부러 찾아 나서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시골 교회의 은은한 종소리가 그리운지도 모른다. 진정 목회자다웠던 작은 교회 목사님의 인자한 미소와 함께.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힘들고 목마른 성도를 위로해야 할 ‘목사님’이 ‘착한 성도’를 너무나 힘들게 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언론의 가십거리로 목회자들의 비리가 등장할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개독교’라는 욕을 하는 이들을 원망하기 전에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기독 창당’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난 그 뉴스를 보며 걱정을 넘어 분노감마저 들었다.
더군다나 기독 창당의 주역이라는 목사님의 이력이 너무나 화려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빤스 목사’ 라는 기사가 인터넷을 도배 했다. 내가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았으니 더는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기독 창당의 본질에 대한 문제다.

종교가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정의가 하수와 같이 흐를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제 몫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고 목사님이 정치를 하겠다는 건, 스스로 똥물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포장일 뿐이다. 부패한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라는 말 역시 믿을 수 없다. 정치인을 바꾸기 전에 목회자 스스로의 삶부터 되돌아 봐야 한다. 교회가 대형화 되어가고 기업화 되면서 목회자들이 기업의 회장님처럼 군림하지는 않았는지?

평신도가 피땀 흘려 낸 헌금을 마치 자신의 개인 돈처럼 쓴 목회자는 없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슨 명목으로든 교인의 주머니를 털면 금방 큰 돈이 걷히는 걸 보며 혹 돈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교회 안의 갈등의 요소를 깊이 들어가 보면 모두가 물질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목회자가 썩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런 마당에 기독 창당이라니. 많은 성도들은 제발 기독 창당이 조용히 닻을 내리길 바라고 있다. 일부 의식 있는 목회자들 역시 반대 성명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얼마 전에 평신도 몇 몇이 모여 기독 창당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모두가 걱정이 되어 한 마디씩 했다.

성추행의 대명사, 대형 교회 당회장직 아들에게 물려주기, 자식 등록금은 물론 유학비까지 교회 돈으로 쓰는 걸 당연히 여기는 목회자, 사택은 물론 전기값, 물값 모두 교회 공금으로 해결하면서도 그 자체를 당연하게 여기는 목회자, 이런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으로’ 라는 말을 부르짖을 때마다 국민들은 ‘저런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절대 안 믿고 싶다.’ 라고 할까봐 두려워. “ 누군가의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라도 탄원서를 보내자고 했다.

“기독 창당을 세워 사회정의를 이루겠다는 목사님들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우리 평신도는 목회자가 목회자 본연의 자리를 지켜 주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성직자는 소명의 자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거룩하며 하늘은 물론 땅으로부터 존중받는 자리여야 합니다. 골방에 들어 가 기도하고, 아프고 힘든 성도 찾아다니며 구제하고 기도해 주는 일에 신경을 쓰셔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 목사님들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더 많이 보게 된단 말입니까? 혹시 목회를 연예인처럼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라 착각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성직자에게 성도는 자식과 같은 존재 아닙니까. 자식은 강대상 앞에서 세상살이 힘들다고 꺼이꺼이 울고 있는데, 목회자들은 더 높은 자리, 더 출세하고 싶은 욕망의 맨 앞줄에서 싸우고 있으니 어쩌란 말입니까?

혹, 그래도 세상 권력이 더 소중하다 여긴다면, 제발 목사, 라는 옷은 벗어 주십시오. 그냥 대한민국 국회에 가면 얼마든지 비슷한 족속을 만날 수 있을 테니 유유히 걸어 들어가십시오. 목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더는 착한 성도님들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부끄러워 피눈물 나는 일은 없게 해 주십시오. 제발


이 글을 쓰는 내내, 가슴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하물며 부패해 가는 이 땅의 종교의 모든 현실을 보는 하늘아버지의 심정은 얼마나 더 아프실까. (2011 9.21, 박경희)

박경희 작가님은
2006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한국방송 라디오부문 작가상을 수상했다. 전에는 극동방송에서 "김혜자와 차 한잔을" 프로의 구성 작가로 18년 간 일하다 지금은 탈북대안학교 '하늘꿈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의 필진이다.

작품으로는 《분홍벽돌집》(다른, 2009), 《이대로 감사합니다》(두란노, 2008),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 2006),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평단문화사, 2004)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국민일보에서 따온 것임-운영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