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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단상

몰지각한 방송사, 남자의 바람기가 특권인가

by anarchopists 2019. 11.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2/21 06:06]에 발행한 글입니다.


신성일 씨, 아직도 애인이 있다구요?

그 남자는 언제 봐도 멋지다. 검은 머리에 하얀 복사꽃이 핀 모습조차도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툭, 툭 불거져 나오는 말을 들으면 기가 막혀 입을 다물 수 없다. 한 마디로 혐오스럽고 욕망에 사로잡힌 추잡한 노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한 때 수많은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배우였다. 그 사랑이 그를 저토록 오만하게 만든 것일까.

배우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자서전으로 남기는 걸 두고 뭐라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책을 팔려는 욕심 때문인지 요즘 여기저기 나와 인터뷰하는 걸 보면 씁쓸하기 그지 없다.

“평생 아내 외에 가슴 속에 품고 산 여자가 따로 있다. 지금도 나는 애인이 있다.”

이 말을 하며 그는 하얗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 든 저의는 무엇일까. 그의 묘한 웃음을 보며 화가 났던 것은 공영 방송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한 물 간 남자 배우가 자서전을 냈기로 서니, 초대 손님으로 불러 거의 치매 수준의 말을 무방비 상태로 들어 주고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인상. 나는 그 프로 남자 MC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늙은 배우의 여성편력을 혹 은근히 부러워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은 아내 외의 여자를 애인으로 만나고 있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수컷의 영웅심리랄까. 언젠가 한 방송국의 기자에게 필자가 직접 들은 말이 있다.

“지난 밤새도록 xxx작가와 술 마셨잖아여. 그 여류 정말 대단해요. 그래서 뜬 거 아닌가 몰라. 새벽에는 몸을 가누지 못해 할 수 없이 잠시 쉬면서 술 깨워 아침에 들여 보냈지요.”

그 기자가 말한 여류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 기자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건 그 남자 기자의 표정이었다. 유명 여류 작가와 한 밤을 지냈다는 말 속에는 자신이 그만큼 대단한 남성이라는 것을 과시하고픈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상대방이 어떤 상상을 하든 상관이 없다는 말투. 여자 작가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염려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신성일 씨 역시 이미 고인이 된 애인에 대한 배려나, 공중파 방송에 나와 건강한 가족에 대해 시간만 나면 강의하기를 좋아하는 살아있는 아내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난 아직 이렇게 건장하며 능력 있는 사내’ 라는 것을 보여 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만이 보였다. 정말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같이 산 아내에게 진정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대범한 척 연기를 하는 걸까. 그 배우가 말한 것처럼 그의 아내는 통이 큰 여자라 쿨하게 넘어갈지는 모르지만 절대적으로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아내 역시 몹시 힘들어 하고 있다는 걸 보도에서 보고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는 정말 철없는 어린 아이 같았다. 아무리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지만 그래도 자신을 공인이라 칭할 때도 있지 않은가. 공인은 공인다울 때 비로소 공인이 되는 것이다. (하긴 요즘은 공인이란 말도 아무나 쓰니 아무렇게 말하고 사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신성일 씨의 여성 편력 및 지금도 애인이 있다는 발언을 들으며, 이 사회가 얼마나 이상한 세계로 추락하고 있는가에 대해 심히 우려가 되었다.

남자의 바람기를 능력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할까 두렵다. 우리 주위에는 아버지의 바람으로 인해 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진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딴 여자를 집안으로 끌여 들였으면서도 당당했다. 왜냐하면 남자니까. 한 집안의 가장은 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는 그런 남편에게 정당한 자기 주장을 펼치지 못하며 살았다.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도 평생 그 남자의 종처럼 사는 걸 운명이라 생각했던 불쌍한 어머니들. 아버지의 부도덕한 모습을 보면서 자란 자식들 또한 (특히 아들) 아침 이슬에 옷 젖듯 바람기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바람기의 유전인 셈이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세상은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영 방송이나 언론 매체를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불륜을 미화하고 있다니. 그는 자신을 어쩌면 시대를 앞서가는 아티스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착각은 자유지만 남에게 불쾌감을 주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기회를 준 일부 몰지각한 방송 또한 반성해야 할 것이다. 혹 주책 맞은 노인의 말이 특종이라도 될 거라 믿었다면 오산이다. 청취자의 의식 수준을 폄하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언론이나 방송이 썩어가는 사회에 대한 정화수 같은 역할은 못할 망정 같이 똥통에서 놀자는 식으로 나가는 건 정말 지양되어야 한다.

신성일씨, 아직도 정력과 힘이 남아 도십니까? 시골에 내려 가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숲과 나무와 흙 속에서 조금 더 도를 닦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혼탁한 세상인데 더는 물 흐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때나마 당신을 멋진 배우로 봐 주었던 순수한 팬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도 지켜 주십시오. 제발. (2011.12.21, 박경희)

박경희 작가님은
2006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한국방송 라디오부문 작가상을 수상했다. 전에는 극동방송에서 "김혜자와 차 한잔을" 프로의 구성 작가로 18년 간 일하다 지금은 탈북대안학교 '하늘꿈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의 필진이다.

작품으로는 《분홍벽돌집》(다른, 2009), 《이대로 감사합니다》(두란노, 2008),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 2006),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평단문화사, 2004)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뉴시스(2011.12.12일자)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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