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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이걸 아시나요, 귀농 꿈 깨세요

by anarchopists 2019. 11.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7/22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걸 아시나요,
귀농자는 수난을 받는다는 사실.

시골산골에 들어와 농업에 종사한 지 10여년이 되었다. 처음에 농촌에 들어올 때는 꿈이 부풀었다. 이제까지 도시에서 살아온 경험(시민사회운동으로 생명 및 농촌운동을 함)을 살려 농촌에서 마지막 삶을 불태우리라는 꿈이었다. 그래서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박동혁과 같이 농촌계몽(자연사랑, 친환경농업, 환생산자협동조합 결성 등)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허물러져 가고 있는 농촌의 농심을 바로 세워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즉 농촌에 새로운 인문주의적 문화를 전파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만 하면 하루가 늘 즐거웠다.

그런데 그 부푼 꿈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부푼 꿈은 시간이 가면서 하루하루 무너지고 나에게는 허무한 시골생활이 되고 말았다. 농민들과 인간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파괴 주범은 문화적 갈등이자 충돌이다. 그래서 인문주의적 문화 전파라는 꿈은 진즉부터 물 건너갔다.

농촌의 농심은 벌써부터 도시의 타락하고 부패한 자본주의 권력에 의해 자본화되고 도시화되면서 멍들고 오염되어 있었다. 이러한 농심의 오염 주범은 이곳 사람들의 말들을 종합하면, 박정희 독재 때,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결론이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때, 글쓴이는 1970년 초, 농촌은 새마을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하여 이미 수사당국에 의해 일주일 동안 수사를 받고 풀려난 적이 있다. 그때의 염려가 이제 드러나고 있다. 우리 농촌의 공동체적 문화와 농민의 아름답던 정서가 완전히 바뀌었다. 진보적(進步: 부패와 부정이 없는, 그리고 타자와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자연과 하나 되는 인간존재를 추구하는 것을 진보라 한다) 진화(進化)가 아닌 타락한 그리고 부패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퇴보하였다. 이제 농민들은 마음이 아니다. 돈이다. 물질이다. 잘 사는 기준이 정신이 아니다. 외형의 크기이다. 행복의 기준이 마음의 평화가 아니다. 물질의 고급화와 많기이다.

농촌계몽, 꿈같은 이야기다. 채영신과 박동혁의 상록수는 일제시대라는 시대상황에 맞는 이야기일 뿐이다. 박정희가 망그러뜨리고 자본화된 시골이이라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농촌계몽은 한낱 어린아이의 소꼽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꿈을 접었다. 시골사람들에게는 그런 짓거리를 하는 내가 잘 난 채 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도시에서 온 우리가 미운 게다. 잘 난 채 하는 우리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싶다. 글쓴이가 살고 있는 땅은 옛날에는 보잘 것 없는 땅이었는데 지금은 죽계계곡 초입경(8곡과 9곡 사이)에 있는 노른자가 되었다. 옛날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들이 지금은 이 땅에 탐을 낸다. 이곳에 펜션을 짓고 돈벌이를 하면 돈이 잘 벌리겠다는 망상에 젖어있다. 그래서 우리를 내쫒고 싶은 게다. 이런 허망에 젖어 있는 이곳, 토착인들로 우리는 지금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 고발당하고 신고당하고 욕먹고 명예를 훼손당하고 이게 지금 농촌계몽을 하고자, 인문주의를 보급하고자 시골에 들어왔던 우리의 제 모습이다.

또 하나 지적해 보자. 시골에 들어와 느낀 것은 유력한 지역민들은 행정관청과 짜고(?) 개인적 이익을 모두 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고발해도 시간이 가면 잠잠해 진다는 사실이다. 막된 말로 '짜고 고스톱'을 치는 격이다. 그런데 외지인은 그런 이익에 동참 할 수 없다. 그저 행정관청에서 규정대로 처리하는 행정에 굴종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지들이 하면 그게 법이다. 불법이 있어도 고발도 신고도 안 한다. 그런데 외지인인 우리가 하면 불법이다. 지들 눈에 거슬리면,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서 고발하고 신고한다. 고통 자체이다. 그것은 나타는 현실 때문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받는 고통 때문이다. 자괴감이다.

예를 들면서 글을 마치자. 하나, 작년 6월경에 영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아 새집을 지었다. 2층 구조로 큐브집이다. 2층은 생활방이고, 1층은 이곳 주민과 영주자락길을 걷는 탕방객을 위한 인문주의적 문화공간(인문학 도서 및, 생활변천사 자료, 동남아 공예품)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하여 1층에 접이식 창호로 외벽을 막고 도서와 공예품 자료들을 진열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토착인이 찾아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 이곳을 자기한테 주었다. 그러니 우리 과수원과 집을 자기한테 주고 나가란다.” 도깨비방망이 두들기는 소리다. 왠 하나님, 이명박이 서울시를 하나님에게 헌납한식인가. 웃으면서 농담으로 치부하였다. 바로 그가 영주시에다 1층 공간을 불법건물로 신고하였다. 자연보전지역에서 문화공간을 만든 것은 불법이란다. 하여 지금 영주시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1층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주변의 자연환경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웃주민과 주변 과수원에도 피해를 일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건축법으로 걸고 넘어가야 하는가. 이게 바로, 토착인이 하면 적법이고, 외지인이 하면 불법인 게다.

둘, 옆집 과원의 아주머니(000)가 우리를 너무 괴롭힌다. 이 여인은 우리가 없으면 우리 노인들한테, 우리가 있으면 우리를 늘 갈구친다. 우리 때문에 물 내려가는 도랑이 넘쳐 빗물이 자기네 과수원에 들어온다고 한다. 도랑은 비가 많이 오면 자연 넘치는 대도 물만 넘치면 우리 탓이란다. 자기네 윗 밭에서 우리 아래 밭으로 물이 내려온 것은 자연이치란다. 그리고 우리보다 낮게 위치한 자기네 과원으로 물이 내려가는 것은 안 된다. 참으로 자연이치를 자기 멋대로 고친다. 또 갈구친다. 우리 과원은 친환경으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풀약(제초제)을 치지 않는다. 이것도 시비걸이이다. 우리가 풀을 안 쳐서 풀씨가 자기네 과수원에 떨어져서 풀 피해가 심하단다.(그네들은 풀 피해가 전혀 없다 .그들은 풀약을 일 년에 3번 정도 치기 때문이다.) 또 시비를 건다. 노인네들이 집밖으로 나가는 길은 오솔길이었다. 그런데 경운기가 생기고  트럭이 생기면서 땅 주인의 허락과 입회하에 트럭이 다닐 정도로 길을 넓히고 포장을 하였다. 그 길은 30여년이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길을 막겠단다. 포크레인을 들여다 포장된 출입구 길을 모두 파내겠단다. 감정적으로 꼬인 여자 같다. 도데체가 이치에도 닿지 않는 일방적 통보성 대화다. 시골에 산다는 게 창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전혀 대화가 안 되는 무식의 공간 한 복판에 내가 서 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지인들은 희망을 갖자고 말한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그러나 농촌의 망가라진 농심을 현실로 본다면 그런 말을 못하리라는 생각이다. 지금은 너무나 무기력한 나를 본다.(2012. 7.21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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