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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요즈음 세상 왜 이꼴이냐

by anarchopists 2020. 1. 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1/05 09:26]에 발행한 글입니다.


요새 세상이 왜 이꼴이냐
-무비판적 언론 보도를 보며-

1. 요새 세상이 왜 이 꼴이냐, 어제까지 못 살겠다 죽겠다 하던 사람들 다 말이 없다. 옳지 않은 것을 위해 극한투쟁을 하겠다고 큰 소리를 하던 정치인들은 다 어떻게 됐나 계엄령 선포 한 달에 세상은 정말 살만큼 개선이 됐는가. 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서인가 그래서 협상인가.

2. 계엄 하에서는 말을 못하는 줄을 알지만 계엄 하에서야말로 말은 해야 한다. 못하게 한 것은 이른바 유언비어지 결코 바른 말이 아니다. 칼을 겨누어 유언비어를 못하게 하는 본뜻은 도리어 바른말을 하도록 하자는 데 있을 것이다.(4권 153쪽)

3. 민중이 뭔가, 살자는 의지인데, 스스로 망할 일을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우중이라, 무지한 백성이라, 그런 소리 마....이제라도 백성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면 불평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요, 백성이 불평이 없으면 나간다 해도 붙들고 제발 정치해달라고 할 것이다. 당신들은 민중의 불평을 사면서까지 언론집회를 압박하려 하나
.(4권 140쪽)

위 글은 함석헌 선생님이 1963년 김포, 경신고동학교, 서울고등학교, 서울시민회관, 댖너시 백사장 등에서 주최 측의 요청을 받고 강연을 하려고 하면, 경찰의 방해로 무산 된 후 〈왜 말을 못 하게 하고 못 듣게 하나-정부당국에 들이대는 말-〉이라는 주제로 쓰신 글이다. 그런데 1963년 하면, 박정희 군부쿠데타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잇을 때이다. 그들의 군사쿠데타공약(박정희 군사쿠데타군은 이를 군사혁명공약이라는 말로 미화시켰다) 6번에는 분명이 “민간(양심 있는 정치인)에게 권력을 이양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쿠데타를 1961년에 일으켜놓고 1963년이 되도록 민간에게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 계속하여 장기 경제개발정책(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1962. 1.13) 등 군사권력의 장기집권 내지는 독재권력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분개한 함석헌이 여러 강연을 통하여 박정희 권력의 언론통제로 알 수 없었던 박정희의 권력장악 음모를 폭로하고 있었다. 오늘의 모습이 그 시대의 모습과 같다고나 할까

하여 오늘은 왜 지식인(언론과 학자)들이 정부에 대하여 말을 못하고 젊은 네티즌만이 광야의 소리를 왜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박정희 독재권력 시절, 74년 말에서 75년 초에 걸쳐 일어났던 《동아일보》(1920.4.1. 창간)의 광고탄압사건을 가지고 오늘의 언론에 대하여 한 마디 하고자 한다. 동아일보의 광고탄압사건은 이렇다.

1970년대 친일파 박정희 독재권력은 3선개헌(1969.10.17)에 이어 유신체제(1972.10)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악법 중 악법인 유신헌법에 의거 국민의 집회시위를 봉쇄하고, 언론통제를 통하여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였다. 이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 200여명은 “신문ㆍ방송ㆍ잡지에 대한 외부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연행 거부” 요지의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채택했다.(1974. 10. 24)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대통령 긴급조치로 침묵하고 있던 ‘민주화운동’이 다시 화산처럼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박정희 군부독재와 그 하수인들은 광고주들에게 동아일보사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정치적 압력을 가하였다. 박정희 권력의 대들보였던 중앙정보부는 74년 12월 중순경부터 75년 7월 초순까지 지속적으로 동아일보사와 계약한 광고주들을 남산 중앙정보부로 불러 동아일보ㆍ동아방송ㆍ여성동아ㆍ신동아, 심지어 동아연감에까지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보안각서를 쓰게 했다. 소액광고주들까지도 중앙정보부에 출두시켰다. 그리고 경찰서의 정보과 직원들도 이들을 연행해 조사했다. 또 중앙정보부는 세무서로 하여금 동아일보 광고주에 대한 세무사찰을 하도록 압박했다. 이것이 이른바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이다. 그러자 이 일은 전 세계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이에 한국의 재야 종교사회단체들도 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독재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는 동아일보에 대하여 돕기운동을 전개하였다. 전 국민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여기에는 보수 진보진영이 따로 없었다. 동창들끼리, 각종 모임의 회원들끼리, 교회와 성당, 참선하던 스님, 학생, 주부, 노동자, 군인들까지 격려 광고의 대열에 동참했다. 수구적 노인과반공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여하였다. 당시 공군 장교였던 글쓴이도 매달 급여를 타면 친구와 함께 그 월급 전체를 네 달 동안 격려광고를 낸 적이 있다. 7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독재권력과 시민과의 싸움은 나약한 언론사주의 배반으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끝은 비참하였다.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하였던 기자 150명의 대량 해고로 이어졌다. 권력의 힘에 굴복함 언론사주에 의해 해고된 동아의 양심적인 언론인 150여명은 즉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해서 계속 투쟁했다.(이상, 진실화해위원회 발표문 요약, 2008.10.29.) 이후 이들 일부 기자들이 《한겨레신문》을 만들어낸다.(1988.5.15)

결국 박정희는 권력내부에 모순이 누적되면서 권력의 대들보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명박 권력도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인상이다. 이명박은 전두환이 진화시킨 언론통제수법을 모방하여 “기본적으로 당근과 채찍정책”을 쓰되, 언론과 방송의 순응체질화정책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이 탓으로 모든 언론과 방송으로 하여금 이명박 권력을 옹호하는 뉴스와 기사만을 내보내고 있다. 그의 실정인 “4대강 불법개발, 친미예속외교, 반통일적 민족정책,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국가정통성 부인, 반민주적인 언론탄압, 대포폰사건, 종부세 감세정책과 서민경제악화” 등 에 대해서는 감추고 있다. 다만 이명박 권력의 실정에 관한 것은 인터넷 네티즌들에 의해 폭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언론매체를 달리하고 있는 계층별로 오늘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다르다. 곧 신문과 방송을 많이 보는 남녀노년층과 일부 아녀자들은 현 정권을 무비판적 인식으로, 기존의 신문과 방송보다는 인터넷 접근을 많이 하고 있는 젊은 층은 현 정권에 대한 부정적 내지는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된다.

역사의 발전은 비판적 사고에서 순기능이 많이 나타난다. 이것을 진보적 성향이라고 한다. 진보적 성향이 없이는 우리 사회를 평화와 안녕이 깃든 행복한 사회로 만들어갈 수 없다.
오늘날 이명박 권력의 정책과 행정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침목하고 있는 언론과 방송은 1970년대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다시 읽어봐 주기를 바란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동아일보광고탄압사건에 대한 진상파악을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였을 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원로 언론인들이 동아일보에게 호소한 말을 오늘에 되살려 다시 상기해 본다. “국민을 오도하는 무책임한 보도를 지양하고,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정신으로 돌아가라.” (2010. 11.5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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