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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오늘의 명상] 4대강 죽이기를 반대하면 역적인가?

by anarchopists 2020. 1. 1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31 07:26]에 발행한 글입니다.


4대강 죽이기를 반대하면 역적인가?

1. 그런데 거리를 내다보면 어찌 그리 죽은 고기떼 같이 밀려 내려가는 인간이 그리도 많으냐? 그게 어찌 인간이냐? 찌꺼기가 밀려 막혀 썩는 하수도 구멍 같이 이 사회에 썪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어떻게 되는 세상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함석헌, <저항의 철학>, 《함석헌저작집》2 인간혁명, 한길사 2009, 115쪽)

2. 이제 오늘은 사람들이 '무식하다, 어리석다, 완고하다'고 무시하던 민중이, 거기서 깨어 항거를 일으키기 시작한 때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일에 뒤죽박죽이 많고 역정이 많고, 사회는 혼란이 휩쓸고 있다. 이것을 보고 어리석은 욕심을 낸 것이 권력주의ㆍ폭력주의의 정치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러한) 사회현상을 타서 야심을 채우자는 데 있으므로 단연 용서할 수 없다. 우리가 항거정신의 고취를 부르짖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앞의 글, 128쪽)

위의 글은 함석헌선생님이 1967년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공화당을 만들어 군사반공독재를 하던 시대에 쓴 글입니다.(《사상계》166호) 군사쿠데타는 정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역입니다. 그래서 이 ‘반역’(叛逆)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오늘의 명상을 해봅시다.

요즈음 드라마와 영화에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이야기들이 인기가 있다고들 합니다. 최근 영화로서는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과 드라마 <동이>가 있습니다. 앞의 것은 정여립과 이몽학을 연결시킨 이야기이고, 동이는 천출 출신인 숙빈의 아들이 후에 왕(英祖)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두 오락물이 표현은 다르지만 당시의 신분사회를 뒤엎는 뉘앙스는 같습니다. 그러면 정여립(鄭汝立, 1546년 ~ 1589년)의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의 주제를 풀어가 봅시다.

정여립은 당시 조선의 사회체제를 비판하여 조선왕조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왕조중심의 역사기록에서 이를 “정여립모반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주체는 민중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역사주체로 이야기 한다면 ‘정여립모반사건’은 ‘정여립기의사건’(기의사건=起義는 역사의 정의편에 서서 당시 사회체제 또는 왕조의 정책에 저항하는 행위를 기의라고 말합니다)으로 기록되어야 마땅합니다.


정여립의 기의사건을 간단히 정리해 보지요. 정여립이 있을 때는, 조선역사에서 선조(宣祖)라는 왕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선조는 조선에서 가장 무능하고 무력한 군주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하여 관료(신하)들이 권력과 재산증식에만 눈이 멀어 기득권 쟁탈전(東黨과 西黨)을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그래서 이틈을 타서 왜놈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던가요=임진왜란, 1592) 이것을 역사에서 당쟁(黨爭; 오늘의 역사가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반대하여 이것을 붕당정치라고 하고 붕당끼리의 싸움을 朋爭이라 기록합니다)이라고 합니다.

정여립은 본래 이율곡 선생과 성혼(成渾 ; 1535~1598)이 이끄는 서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율곡선생이 죽고 나서 정여립은 이퇴계 선생이 이끄는 동당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율곡선생의 사상과 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정여립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 서당사람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자연 정여립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전주=완주)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정여립은 일찍이 당시 조선 주변의 국제정세가 불안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간 정여립은 이를 대비하여 대동계(大同契=일종의 민군조직입니다.)라는 민군을 조직합니다. 이것을 전국에 확대하였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됩니다. 황해도지역의 배반자들이 정여립이 모반을 위한 군대조직을 만들었다고 더러운 밀고를 합니다. 한 개인의 애국충정이 역적(반역)이 되는 순간입니다. 오늘날 국가보안법으로 정당한 시민이 이적행위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하여 선조의 명을 받고 정철(鄭澈 1536~1593, 무능한 선조를 미인으로 비교한 사미인곡을 지었던 희대의 아부꾼)이 이끄는 정부탄압군에 의하여 정여립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기록에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이때 정여립과 관련된 동당사람들이 엄청남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여립은 과연 자살했을까요. 그의 죽음은 아마도 노무현대통령과 같은 죽음의 성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정여립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정여립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나타나고 있던 민권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맹자(孟子)의 백성 중심의 정치(爲民思想)을 철저히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백성이 임금보다 더 소중하다(民重君經)는 생각을 대동계에 심어주었습니다. 또 유교중심주의 정치질서를 타파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곧 3강 중, 임금은 신하의 기둥이 된다(君臣綱常論)는 논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에서 19세기 후반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나는 생각입니다. 또 정여립은 “나라의 모든 재산은 백성 모두의 것이다.”(天下公物說)라는 평균적 공산사회 건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나는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1490~1525)의 사상과 같습니다. 또 정여립은 “임금은 아무라도 될 수 있다”(何事非君論; 누가 임금이 된들 섬기지 않겠는가)는 생각을 가지고 군주혈통주의를 부정하였습니다. 이것은 18세기 프랑스의 시민혁명에서나 나타나는 공화주의 사상입니다. 이렇게 보면 정여립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의 명상을 해봅시다. 우리 역사에서는 기득권(왕)을 몰아내려고 하는 자들을 역적이라고 하고 그 행위를 반란이라고 합니다. 기득권세력(왕과 귀족)이 아무리 잘못하여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었던 시대에 쓰여진 역적이니 반역이니 하는 용어들은 이제 고쳐져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역사의 주체는 민중입니다, 그래서 역사기록도 역사의 주체인 민중을 중심을 다시 써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정여립기의사건’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리고 또 생각해 봅니다. 함 선생님이 말씀하신 “찌꺼기가 밀려 막혀 썩는 하수도 구멍 같이 이 사회에 썪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것은 왜 일까요 4대강이 막혀서가 아닐까요. 자연환경을 살리기 위하여 이명박 권력이 저지르고 있는 4대강 죽이기를 반대하면 역적일까요(2010. 8.31 이른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위 사진은 인터넷에서 따온 사진들임 마지막 사진은 진안 앞바다의 죽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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