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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말씀

[오늘의 명상] 아름다운 이 나라에 인물이 어찌 없나

by anarchopists 2020. 1. 1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7/2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인물이 왜 없나

[함석헌의 말씀]
"우리나라의 자연은 그 변화가 많은 데 특색이 있습니다... 하늘은 언제나 맑고 바람은 언제나 대체로 잔잔하고 어디 가서 물을 마셔도 다 달고 시원하고, 한마디로 이 나라는 아름다움의 나라입니다. 시의 나라요, 그림의 나라요, 음악의 나라가 될 것이지 정치의 나라, 군사의 나라 될 곳이 아닙니다. 여기는 슬기가 있을 나라지 힘을 주장할 나라는 아닙니다. 여기는 생각할 곳이지 바삐 떠돌 곳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현실계를 떠나 영원 무한에 접해 보려는 신선 사상이 있었고 중국사람이 삼신산(三神山)이 여기 있고 죽지 않는 약이 여기 있다고 찾은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도교사상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어 중국으로 간 것일 거라는 이능화님의 말이 노상 맹랑한 말이 아닙니다. 단군을 선인(仙人)이라고 했고 평양을 선인의 집이라 하며... 골짜기마다 신선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난 문화의 꼭지입니다. 후에 유교가 온 다음 그것을 배우는 사람을 선비라 하였는데 선비는 본래 우리나라의 처음부터 있는 종교의 사람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가? 우리민족의 성격의 고갱이는 나는 착함이라 합니다. 평화의 사람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것을 말하는 것이 바보 온달의 얘기요, 처용(處容)의 이야기입니다. 그 둘과 같이 옛날 대표적인 한 사람 성격을 표시하는 또 하나는 검도령입니다. 온달이 고구려, 처용이 신라, 검도령은 백제입니다. 검도령은 저 중국 장량을 도와서 박랑사 보래밭에서 진시황을 때라려다 실패하고 죽은 그 이야기로 세상이 잘 아는 사람입니다. 쇠뭉치로 진시황을 때렸으니 폭력주의인 것 같으나 그 역시 밑은 신선사상의 사람입니다. 그의 친구를 돕는 의기에서 한 것인데 그 장량은 신선이 됐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사람은 평화의 사람입니다. 역사 있은 이래 한번도 남의 나라를 쳐들어간 일이 없고 전쟁을 늘 내집에서 겪는 막는 싸움이었지 날도둑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평화적인 성격이 그렇지 않을까요? 3.1운동, 4.19의 비폭력 운동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함석헌전집1권, 365-6쪽)

[오늘의 명상]
지난 번 전재한, [함석헌 읽기]에 발표한 글에서 나는 함석헌이 우리가 평화민족이라 하면서 그 대표로 바보 온달(고구려), 처용(신라)과 더불어 검도령(백제)을 말했다고 하는 맥락에서 폭력을 행사한 검도령에 대한 의문을 말했다. 여기에서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다. 정의로운 행동이라면 폭력도 평화주의에 수렴될 수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 대목이다. 이것은 장군이 된 온달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함석헌의 평화주의는 엄격한 간디식 비폭력주의와 다소 차이가 있다. 민족적 차원에서 우리는 외침만 받았지 (역사가의 셈으로는 970여 차례) 다른 민족을 침략해본 적이 없다. (미국의 용병처럼 경제적 목적으로 박정희의 월남 파병은 아마 거의 유일한 예외라 할까.) 그것을 민족주의라 한다면 그것은 다른 민족처럼 침략적 공격성이 아닌 방어적 민족주의였다. 함석헌이 위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전쟁은 모두 방어전이었지 침략전이 아니었다.”(전집1:89쪽)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경계하는 주변 강대국(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에 이 점을 주지시킬 외교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중국과 북한을 따돌려 놓고 미국과만 밀착하는 우둔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외교 실력이다. (미국 국무, 국방 장관의 전례 없는 판문점 방문과 합동 군사훈련이 그 증거이다.) 그야말로 주변머리 없는 외교이다. 통일의 길은 더욱 더 멀어지고 있다.

이 말씀(1963년 강연)에서 유의할 다른 대목은 선인(仙人) 사상, 선비 전통이 원래 있던 민족의 종교를 대표했다는 관점이다. 함석헌을 한 (외래)종교에만 집착하는 신앙인이라고만 알고만 있다면 그것은 함석헌의 전체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함석헌이 귀향했다면 어디로 했을까. 그의 탈향과 귀향을 한 종교의 맥락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그의 신앙과 사상의 지평을 좁히는 짓이다. 이것은 함석헌과 더불어 기독교 해석에 창조성을 발휘한 김재준 목사(한신대 창설자)에서도 발견된다.

그도 민족의 사상, 종교전통을 중시한 큰 인물이었다. 두 분은 문자주의보다 뜻과 행동을 강조한 선비였다. 두 인물을 통하지 않고는 외래종교(기독교)의 토착화는 요원할 것이다. 이 땅에서 유교가 토착화하지 못하고 중국유교의 아류가 되어버린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이 두 인물을 근거리에서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 분위기를 숨 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숨이 막힌다.) (2010.7.27,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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