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말씀

[말씀과 명상] 함석헌의 말씀과 오늘의 명상 3

by anarchopists 2020. 1. 1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5/2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말씀과 명상]
함석헌의 말씀과 오늘의 명상 3

함석헌의 말씀을 새김

- 나는 지브란에게서 한 친구를 발견했다. 그는 말했다. "벗을 사귀는 데 정신을 깊이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말라." 그는 내가 빠진 밑바닥, 지옥바닥, 멸망할 자만이 있다는 그 바닥에 내려와서 따뜻한 손으로 일으켜 거기서도 오히려 일어설 수 있게 함으로써 내 정신을 한층 깊게 해주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보는 하늘은 유난히 높았다.

내가 스승이 없지 않고 친구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 이름을 가지고 나를 찾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장자도, 톨스토이도, 간디도, 남강도, 우치무라도 다 내가 이름도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나는 무슨 교도도, 누구의 제자도, 누구의 친구도 될 자격이 없고 다만 한 개 깨진 배이다.

다만 칼릴 지브란만은 들의 한 송이 작은 풀꽃같이 이름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독점하려 하지 않았고 자유롭게 그 외로운 나그네의 옆에 올 수 있었다. 어느 의미로는 내가 이 나라의 대표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의인보다는 죄인이 많지 않을까. 제 잘못으로거나 남의 잘못으로거나 세계의 큰길 위에 나앉은 늙은 갈보요, 수난의 여왕이지. 또 어느 의미로 우리나라가 세계의 대표는 아닐까.

이리하여 나는 이 글을 우리말로 옮겼다. 군인에게도, 학생에게도, 농사꾼에게도, 엉터리 장사꾼에게도, 깡패에게도, 사창굴의 짓밟힌 꽃에게도, 철창 밑에 매어놓은 승냥이에게도 다 한권씩 주고 싶어서.... 그들도 다 내 마음일 것만 같아서.... 이제 보니 미운 사람, 몹쓸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저작집 27권 28쪽, 칼릴 지브란 『예언자』역자서문)

- 칼릴 지브란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내 이웃이란 뭐냐” 내 또 다른 자아(my another self)다.“ 참 좋은 말 아니요? 사람들이 내 자아만 귀한 줄 알지만, 이웃 사람도 내 다른 자아다. 조금 큰 의미로 하면 이 나라에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다 나의 자아란 거예요.(『끝나지 않은 강연』 147쪽)

오늘의 명상

“또 다른 자아(나)”, 나와 이웃의 유기적, 연기적 관계를 이처럼 잘 해석한 표현도 드물다. 명언이다. 북한 사람은 내 이웃이 아닌가? 쌀이라도 퍼주면 절대 안 되는 원수인가? 무철학, 무종교의 정치가 남북대치, 사회분열, 양극화가 더 심화된 오늘의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고도, 신앙이 있다고? 이웃을 사랑하라!

앞글에 함석헌의 참회와 절망의 고통이 묻어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적인 사건으로 “내가 60년 동안 쌓아온 모래탑은 와르르 무너졌다”고 고백한다. 자신만이라기보다 “나와 같이 그 모래탑을 쌓던 바로 그 사람들이 무너뜨렸다”고 하면서, “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내 얼굴에 거품을 끼얹고 발길로 차 던지고 저희도 울며 갖는지 손뼉 치며 갔는지 나 몰라. 나는 영원의 밀물이 드나드는 바닷가에 그 영원의 음악을 못 들은 척 딩굴고 울부짖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죽었다”고 생각했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고 할 정도로 신앙도 위선이요 무용지물인 것을 깨달았다. 자신만이 아니고 친구, 이웃,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낀 절망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실상을 체험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전체론적 사상은 더 깊어져갔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지브란도 만났다. “칼릴 지브란은 나를 똥간에 빠진 데서 이끌어냈다.” (그래서 이 체험은 나중에 미국 퀘이커 센터 펜들 힐에 가서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가 다른 사도들과 별개의 인간이 아님을 체험하는 획기적인 사건 속에서 더 영글어졌을 것이다. -「펜들힐의 명상」참조.)

〈자료〉
(누구에게나 “다 한 귄씩 주고싶은” 함석헌의 번역이 한 가수에게 큰 영감과 깨달음을 일으킨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다.)

- “그가 <예언자>를 처음 본 것은 1977년 <씨알의 소리>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번역본을 우연히 읽고선 충격을 받았다. '죽음을 보고 싶거든 삶의 문을 열어라'라는 구절이 그렇게 와 닿을 수 없었단다. 79년 가수 데뷔 때부터 <예언자>를 음악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2~3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작업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곡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문제는 가사죠. <예언자> 내용이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다 보니 노랫말 쓰는 게 참 어렵더라고요." 맨 먼저 만든 '죽음에 대하여' 한 곡만 87년 1집 음반에 실었다. 그는 다시 <예언자>를 꺼내들어 읽고 또 읽었다. 어느덧 지천명에 이르렀다. "제 나이 쉰이 넘고 아버지를 비롯해 가까운 분들이 세상을 하나둘 떠나고 나니 마음가짐이 달라지더군요. 그제야 <예언자>가 말하는 게 뭔지 알아먹겠더라고요." "30년 동안 이 작업해오면서 돈은 못 벌었어도 행복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음반을 듣고 성찰하고 깨달음을 얻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한겨레 5월 6일자, 가수 정형근에 관한 기사) -김영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