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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단상

[오늘의 명상] 대학로의 실개천

by anarchopists 2020. 1. 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0/0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대학로의 실개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가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누구나 실개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보자기 가방 메고
십리 길을 동무들과 걸어오며 실개천에 흐르는 물 그대로를
나뭇잎에 떠 마시던 추억과 함께.
대학로 원주민으로서 실개천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솔직히 설렜다.

'향수'에 나오는 실개천은 아닐지라도 밤낮으로 졸졸 흐르는 도랑물을
매일 오가며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적잖이 흥분되기도 했다.
얼마 후, 언론에서 대학로에 실개천이 생겼다고 요란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나갔다 난 실소를 금치 못하고 말았다.

'지금 시민들에게 장난 하십니까?'
졸속 행정의 표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대상은 누가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소리쳐 묻고 싶었다.
손바닥 만한 실개천에 졸졸은 커녕 갓난아기 오줌 줄기 정도의 물이
간신히 흘러 갈 뿐이었다. 차라리 작은 화단이 나을 뻔 했다.

그 후에 나가다 보면 실개천엔 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바닥에 노루오줌만큼 남은 물은 금세 오염되어 악취가 났다. 이어 바닥의 돌들은 푸른 이끼가 끼어 흉측한 몰골로 변하고 말았다. 한 마디로 대학로의 실개천은 매연 속에서 신병을 앓고 있었다.

어제 나는 외출하다 말고 실개천의 또 다른 풍경을 보고 말았다.
긴 장화를 신은 아저씨가 발등에 찰까말까한 실개천에 들어가 돌멩이에 붙은 이끼를
플라스틱 빗자루로 박박, 긁어대고 있는 게 아닌가.

문화의 거리, 대학로 한복판에서 푸른 이끼를 긁어내고 있는 아저씨의 눈길은 왠지 허망해 보였다.
나 또한 서글픈 실개천의 풍경을 언제까지 보아야 하는 건지. 가슴이 아리다.
(2010.10.4., 박경회)

박경희 작가님은
2006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한국방송 라디오부문 작가상을 수상했다. 전에는 극동방송에서 "김혜자와 차 한잔을" 프로의 구성 작가로 18년 간 일하다 지금은 탈북대안학교 '하늘꿈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의 필진이다.

작품으로는 《분홍벽돌집》(다른, 2009), 《이대로 감사합니다》(두란노, 2008),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고려문화사, 2006),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평단문화사, 2004)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포럼>의 새필진으로 극동방송 방송작가인 박경희 작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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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다움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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