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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단상

마로니에 공원의 노숙자

by anarchopists 2020. 1. 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0/0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마로니에 공원의 노숙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제보다 더 멋지십니다."
외출하기 위해 마로니에 공원을 지날 때마다 그는 너스레를 떨며
내게 인사를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어느 날 교회 식당에서였다. 우리 교회는 매 주일 교인들을 위해
무료로 점심을 제공한다.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선 그는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등이 얼핏
보기엔 평범한 샐러리맨 같아 보였다. 그러나 곁에서 밥을 먹다 보니 온몸에서 쉰내가 진동했고 눈동자는 풀려있었다.
남자는 식당 밥을 한 번만이 아니라 두세 번까지 연신 갖다 먹더니 급기야 준비 해 온 검은 비닐봉지에 새 밥을 갖다 반찬과 같이 꾹꾹 쑤셔 넣었다.

나는 그의 예사롭지 않은 행동을 보며 물었다.
"그렇게 밥과 반찬을 섞어 넣으면 맛이 없잖아요."
"맛 따질 처집니까. 히히. 공짜 밥 얻을 수 있을 때 잔뜩 꿍쳐 야지요."
나는 잠깐 당황했지만 더는 할 말이 없어 그냥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그는 점심시간이면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 날도 그의 곁에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그는 묻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하듯 털어 놓았다.

"제가 이 몰골이어도 미술을 전공했어요. 정릉에 어머니 집도 있어요. 그러나 전 이렇게 밥 얻어먹고 아무데서나 내 집처럼 잘 수 있는 이 삶이 자유롭고 좋아요. 대신 어머니한테 일 주일에 한 번씩 가서 빨래는 해 갖고 와요."

입에서 풀풀 술 냄새가 났다. 난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일을 찾아보시지 그러세요. 더군다나 그림을 전공하셨다면서."
"오죽하면 노숙자가 됐겠습니까. 이게 내 팔자인 것 같아요. 처음 잠깐 쪽팔리는 것만 눈감으면 노숙자 생활도 괜찮습니다요."

남자는 너무나 당당하게 노숙 생활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 후로 남자는 공원에서 나를 보기만 하면 반갑게, 거기다 목소리까지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난 남자가 친한 척 아는 체를 하는 게 부담스럽다. 그가 두렵다거나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결단코. 내 마음 속에 그가 일자리를 찾기보다는 공짜 밥에 대한 자유를 예찬하던 모습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법 바람이 차다. 머지않아 겨울이 찾아 올 것이다. 마로니에 공원 아무데서나 쪽잠을 자던 많은 노숙자들에게는 힘든 계절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을 바라볼 때 무조건 동정했다. 오죽하면 노숙자가 되었을까, 싶어 안쓰러웠다. 그러나 요즘은 가까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동정으로 건넨 지폐가 그들을 알콜 중독자로 만드는 건 아닌지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나의 마음이 너무 각박해져 가는 것일까. (2010.10.5 저녁, 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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