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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경희 작가 단상

마음이 가난한 자에 복이 있나니.

by anarchopists 2020. 1. 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1/30 06:56]에 발행한 글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 그리고 종합선물세트

이름표 밑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보헤미안 기질이 강한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비우셨다. 명목상 사업 구상 때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물 흐르는 대로 어딘가를 떠돌다 내키면 다시 집으로 돌아 오셨던 것 같다.

어느 깊은 겨울밤, 컹컹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술 취한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보름 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이방인처럼 낯설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아버지의 술주정이 시작되기 전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금살금 사랑방으로 건너가는 나를 붙잡은 건 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옛다. 니들 선물. 도회지에서 사 온 것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고독해 보이는 아버지가 큼지막한 상자를 쿵, 마루에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선물? 나는 그 때까지 ‘선물’이라는 말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던 촌아이였다. 순간, 내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곧이어 오빠와 동생이 잠옷 차림으로 후다닥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엄마의 부축을 받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후, 우리는 보물섬을 발견한 아이들처럼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욱, 오빠가 먼저 포장지를 뜯었다. 동생은 고사리 같은 손만 연신 만지락거리며 오빠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나는 오빠가 팽개친 포장지를 곱게 접는 것으로 흥분을 감췄다. 드디어 우리 앞에 보물 함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곱 색깔 무지갯빛 사탕, 그토록 선망의 대상이던 오리온 과자, 먹음직스런 도넛, 환상의 풍선껌, 배고플 때 최고의 간식인 별사탕 들어 있는 건빵 등등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우, 이거 다 진짜 우리 거야? 증말루?”

동생은 너무 좋아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오빠와 나 역시 태어나 처음 받아 보는 선물, 그것도 종합선물세트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가슴이 둥당거렸다. 우린 그날 결코 상자 속의 과자나 사탕을 한 점도 먹지 않았다. 너무 소중했으므로 아끼는 마음으로. 지금도 그날의 감격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짓곤 한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고 나니, 나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 삶을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릴 시절 종합선물세트를 받았을 때처럼 큰 기쁨을 주는, 휘휘 주위를 둘러본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손을 내민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다짐해 본다. 다 가진 듯 하지만 외롭고 쓸쓸하다는 친구에게는 난로 같은 존재로, 살아갈수록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다는 후배에게는 빛을 밝히는 등대지기로, 시나브로 찾아 온 노년의 문턱에서 허망해 하는 선배에게는 인생 제 2막의 깃발을 안겨주는 후배로, 몸과 마음 모두 아파 죽음보다 깊은 잠을 선택하고 싶다는 이웃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글 감옥 속에 갇혀 사느라 영혼은 물론 뼈까지 시리다는 동인에게는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감성으로 어루만져 주는 도반으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이 모든 것을 나라는 상자 안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합선물세트 안에 넣을 것들을 준비하는 손길이, 받을 때보다 더 기쁘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오늘. 찬 겨울바람마저도 따사롭게 느껴진다. 북한에게 배풀 때 포격이 있었는가. 성서에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마태복음, 5장 2~3절)고 하였는데 이명박 장로는 마음이 부자인가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슬픔은 베풀지 않는 풍토 때문이 아닐런지  (2010. 11.29, 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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