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2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내가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초 이 나라 결딴낸 게 뭔고 하니 내가 하겠다는 것, 그것이 결딴을 내지 않았어요? 이 대통령 때부터. ‘나’라는 것이 뭔데 그리도 과대평가를 합니까. 벽돌을 오늘 저녁에 하나 놓으세요. 그럼 그 위에 다른 사람들이 놓고 또 놓고 그러면, 내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내가 받치고 있는 게 되잖아요? 사실 ‘내’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빌어먹을 ‘나’란 거 좀 없애버리세요. 그걸 위해 예수가 죽었는데, 예수 믿는다면서 아직도 ‘내가 하겠다’ 그럽니까? 돌아가시면 간디를 잘 씹으세요. 간디의 정신이 살로 가고, 피로 가면 눈에는 안 보여도 서서히 기적이 생길 겁니다. (함석헌저작집 12권 105-6쪽)
윗글은 함석헌이 간디 서거 34주기(1982)에 행한 추모강연에서 한 말이다. 한국의 정치현실과 종교의 근본정신을 함께 엮어서 말하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요체가 여기에 들어있다. 통치자나 종교인이나 이기적인 ‘나’(ego)즉 소아(小我)를 버리는 것이 첫째 자격이다. 그러고 나서 대아(大我)나 참나(眞我)에 이를 수 있다. 무아(無我)가 종교의 알짬이다. 무아 즉 이기적인 나를 버림은 불교만이 아니고 기독교를 포함 인간구원이나 해탈을 표방하는 모든 종교에서 수행의 목표가 된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하늘나라에도 진리에도 이를 수 없다. 이 ‘나’가 웬수다. 인간관계에서 얼마큼 이 ‘나’가 발동하느냐, 즉 이기(利己)심, 이기성이 한 개인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지도자, 친구, 상사, 종교인, 사제의 됨됨이를 측정할 수 있다. 이기심이 많을수록 당연히 이타(利他)심은 적어진다. (주변 인물의 점수를 매겨보라. 참 친구는 누구인가. 자신의 점수는 얼마일까. 자신도 남에게 참 친구가 될 수 있나.)
자기를 버린 간디는 그래서 마하트마(Mahatma) 즉 위대한 영혼, 대아(大我)로 불렸다. 간디처럼 함석헌도 우리에게 ‘벽돌 하나’의 바탕을 깔아놓았다. 이제 그 위에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은 씨알 하나하나의 몫이다. 그것이 진리의 바통을 받는 길이다. 예수나 부처는 말할 것도 없고, 간디고 함석헌이고 그 말이나 글에만 감탄하지 말고 그 정신을 ‘살로 가고 피로 가’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정신을 잇는 길이다. 그것은,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라고 말할 수 있듯이, 이들만큼 위대하지 않더라도 간디가 되고 함석헌이 되라는 뜻이다.
같은 잣대로 우리 역사에서 군주, 통치자를 평가할 수 있다. 함석헌이 잘 기술한 것처럼 무리한 쿠데타로 왕조를 뒤엎은 이성계의 나라가 어떻게 끝났나. 500년 세월동안 문화다운 문화의 발전이나 사회발전이 있었나.
해방 후 여태까지 이승만 부터 ‘나’가 유난히 강한 정치인들이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일제 시대에 맞먹는 기간 동안 군사독재로 후퇴시킨 정치와 사회질서는 한 세대가 지났는데도 그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엊그제도 그 수구세력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정권재창출을 논의했다는 소식이다.
오늘도 국민의 뜻을 무시한 ‘나’ 중심의 통치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함석헌의 메시지를 반추해봐야 한다. 어둠의 세력은 지금 이 아름다운 강산의 젖줄을 결딴내려하고 있다. 강은 자연이고 자연은 진리다. 진리의 강물이 그대로 흐르게 놔두라!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 막고 있는 상황이 무더운 날씨와 겹쳐서 더욱 답답하다.(2010.8.24, 김영호)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윗글은 함석헌이 간디 서거 34주기(1982)에 행한 추모강연에서 한 말이다. 한국의 정치현실과 종교의 근본정신을 함께 엮어서 말하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요체가 여기에 들어있다. 통치자나 종교인이나 이기적인 ‘나’(ego)즉 소아(小我)를 버리는 것이 첫째 자격이다. 그러고 나서 대아(大我)나 참나(眞我)에 이를 수 있다. 무아(無我)가 종교의 알짬이다. 무아 즉 이기적인 나를 버림은 불교만이 아니고 기독교를 포함 인간구원이나 해탈을 표방하는 모든 종교에서 수행의 목표가 된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하늘나라에도 진리에도 이를 수 없다. 이 ‘나’가 웬수다. 인간관계에서 얼마큼 이 ‘나’가 발동하느냐, 즉 이기(利己)심, 이기성이 한 개인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지도자, 친구, 상사, 종교인, 사제의 됨됨이를 측정할 수 있다. 이기심이 많을수록 당연히 이타(利他)심은 적어진다. (주변 인물의 점수를 매겨보라. 참 친구는 누구인가. 자신의 점수는 얼마일까. 자신도 남에게 참 친구가 될 수 있나.)
자기를 버린 간디는 그래서 마하트마(Mahatma) 즉 위대한 영혼, 대아(大我)로 불렸다. 간디처럼 함석헌도 우리에게 ‘벽돌 하나’의 바탕을 깔아놓았다. 이제 그 위에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은 씨알 하나하나의 몫이다. 그것이 진리의 바통을 받는 길이다. 예수나 부처는 말할 것도 없고, 간디고 함석헌이고 그 말이나 글에만 감탄하지 말고 그 정신을 ‘살로 가고 피로 가’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정신을 잇는 길이다. 그것은,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라고 말할 수 있듯이, 이들만큼 위대하지 않더라도 간디가 되고 함석헌이 되라는 뜻이다.
같은 잣대로 우리 역사에서 군주, 통치자를 평가할 수 있다. 함석헌이 잘 기술한 것처럼 무리한 쿠데타로 왕조를 뒤엎은 이성계의 나라가 어떻게 끝났나. 500년 세월동안 문화다운 문화의 발전이나 사회발전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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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여태까지 이승만 부터 ‘나’가 유난히 강한 정치인들이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일제 시대에 맞먹는 기간 동안 군사독재로 후퇴시킨 정치와 사회질서는 한 세대가 지났는데도 그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엊그제도 그 수구세력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정권재창출을 논의했다는 소식이다.
오늘도 국민의 뜻을 무시한 ‘나’ 중심의 통치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함석헌의 메시지를 반추해봐야 한다. 어둠의 세력은 지금 이 아름다운 강산의 젖줄을 결딴내려하고 있다. 강은 자연이고 자연은 진리다. 진리의 강물이 그대로 흐르게 놔두라!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 막고 있는 상황이 무더운 날씨와 겹쳐서 더욱 답답하다.(2010.8.24,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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