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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오늘의 명상] 개인구원보다는 전체의 행복을 추구해야

by anarchopists 2020. 1. 1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27 06:42]에 발행한 글입니다.


개인구원보다는 전체행복을 추구해야.

1. 인도에 도를 믿노라 하던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이젠 세상 떠났어. 그이는 젊었을 때는 문학에 재주가 있어서 문학작품도 많이 발표하다가 생각이 달라져서 “이거 다 쓸데없다” 그러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요가에만 전심해. 그래 모든 사람들이 섭섭하게 생각했다는 거야. “두뇌 명석하고 재주 있어 좋은 글 써줄 줄 알았는데, 이 사람 역시 옛날 사람모양으로 현실도피하고 산속으로 들어갔구나.” 그이가 어느 날 뭐라는고 하니 “나의 요가는 나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인류를 위해 하는 거다” 그랬어. 그걸 보고 인도 사람들이 말했어. “그러면 그렇지. 그 큰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구나.”

2. 여기 [요새 하는] 요가는 나도 아니고 내 껍데기를 위해서 하고 있어요. 껍데기를 위해서 요가하고 있지 내 속에 있는 양심을 위해 하는 요가 어디 있어요? 그것도 없지 않아요? 우리도 그래요. 주일날 교회 간다면 ‘난 내 영혼을 위해서간다“니 참 답답해요. 옳긴 옳은 말인데 마음이 고렇게 좁아가지고야 어떡하겠어요. ”성경에 개인의 영혼 구원 얻는 것이 문제라 했지, 성경에는 사회란 말 없습니다.“[하면서 내 말을 비판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바로 이 자리에 몇 해 전에 도시산업[선교]를 위해서 [일한 분이 계시지만]...

3.사람의 목적이 어디 있나? 하나님까지 도달하자는 거지요. 본래 하나님과 하나인데 지금 여기 공부하러 내려온 거요. 제가 자식이 되려면 남의 집 밥을 먹어본 다음에야 된다고, 고생을 겪고 해야 아들 노릇 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보내서 훈련시키느라고 온 거다. 그런 식으로 아시라 그 말이야...

4. 우리가 이 앞의 역사 찾는 것도 나 한 사람을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지. 나도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 내 속사람만이 아니고 인류 전체를 위해 하는 거예요. (이상, 함석헌저작집 13권 217-218)

위의 연속된 강설 속에 함석헌 사상의 몇 가지 큰 줄기가 깔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론과 사회구원, 신관, 국가관과 세계주의 같은 것이 그것이다. 만년(1985)에 속한 말씀이기에 더욱 그럴 만하다. 사상의 발전과정에서 나중에 함석헌은 스스로를 개인주의를 넘어선 전체주의자로 자리매김 했다. 이는 독재적인 전체주의(totalitarianism)가 아니고 모두를 아우르는 틀로서의 전체론(holism)이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전체’와 동의어(하나-님)로서 삼는다. “(개인이 아닌) 전체가 같이 나아가야한다.” 어원상으로 ‘성스러움’(holy)도 '모두'(whole)를 가리킨다. 전체는 ‘사회’(전체)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했더니, 마치 이 말에 함석헌 해석의 정통성과 조직 헤게모니가 달려있는 것처럼, 한 집단에서 벌떼처럼 공격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함석헌 마니아의 광기를 발산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한말 개화파에서 알고 있던 사회진화론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알고 있다가 이제 계몽시대를 맞이한 셈이다. 개념의 발원지인 서구에서 사회진화론도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우리학계에서 한 세기 이상 동안 진행된 오독을 정지시켰다고 믿는다. 앞으로 그 반응이 어떻게 나타날지 흥미롭다. 학자들의 수준과 학문적 자세를 가늠해보고 사실이나 진리가 언제까지 왜곡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인구원’ 아닌 사회구원을 여기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시대에 주장하던 산업선교를 뒷받침하는 원리가 사회구원이고 그 이론을 함석헌이 제시한 셈이다. 이 사상은 동서를 통틀어 획기적인 것이다. 함석헌의 독창성이 빛나고 있는 대목이다. 그 자신과 민족전체가 20세기 내내 겪었던 고난 속에서 일궈낸 값진 열매이다. 그의 ‘하나님’은 기독교적인 신관의 울타리를 뛰어 넘는다. “본래 하나님과 하나”라는 생각은 서구 기독교에서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함석헌은 오히려 우리 전통 속의 ‘한’의 뜻에 충실하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인내천’(人乃天)과 상통한다. 함석헌 식 이해를 통해서만 기독교 또는 어느 외래 종교의 토착화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요가’의 해석도 특이하고 타당하게 들린다. ‘요가’는 단순한 건강 운동이 아니고 ‘종교’나 ‘도’(道)에 해당하는 말이다. 힌두교 성전 [바가바드기타]에서 제시한 ‘행동’의 요가(karma-yoga)는 그 한 가지이다. ‘지혜’와 ‘신앙’의 요가도 있다. 요새 많이들 하는 요가는 ‘하타’ 요가에 속하지만 그 깊은 뿌리는 모르고 ‘껍대기’만 하고 있는 셈이다. 함석헌이 여기서 그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인도 성자는 오로빈도(Aurobindo 1872-1950)로 보인다. 그는 영국지배에 저항하다가 종교체험을 한 후 요가수행에 전심했다. 그는 요가수행을 삶과 통합하는 통합적 요가(integral yoga)를 주장했다.) 다른 종교 행위처럼 모든 요가는 개인구원보다는 사회전체, 인류를 위한 수행이라는 것을 함석헌이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혼자만의 행복이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성립이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사회진화 과정에서 우리는 아직 철저한 개인주의에 머물러 있다. 우리사회처럼 개인주의 사회는 없다. 또한 함석헌이 우리가 넘어서야할 것으로 배격하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단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010.8.25,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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