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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영주 소백산 자락길이 죽어간다.

by anarchopists 2019. 11.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3/05 07:08]에 발행한 글입니다.


영주 소백산 자락길이 죽어간다.

경북 풍기 쪽에 있는 국립공원 소백산에 고려말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안향(安珦)선생의 호를 따서 붙인 죽계(竹溪)계곡이 흐른다. 소백산 죽계계곡은 국망봉 아래의 석륜암(石崙庵)골과 비로봉 아래의 하가동(下伽洞) 달밭골이 초암사(草庵寺) 지점에서 합류하여 아홉 곳의 비경을 만들면서 소수서원 백운동계곡까지 흘러내린다.

죽계구곡은 고려시대 안축(安軸) 선생이 읊은 경기체가《죽계별곡》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 선생도 노리었다. 죽계구곡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여러 말이 있지만 조선 명종 때 풍기군수로 와 있던 퇴계(退溪) 이황(李愰) 선생이 붙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초암골에서 흘러내리는 수정 같이 맑은 계곡물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하게 생긴 바위와 크고 작은 돌들을 감아돌며 우당탕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굽이쳐 흘러내린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의 으슥한 산굽이마다 낮은 높이의 단안(斷岸)이 있어서 흐르던 물들이 이곳에서 작은 폭포를 이르며 떨어진다. 그리고 폭포의 물줄기가 밑의 용소(龍沼)로 떨어질 때면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물보라가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무지개를 피워낸다. 퇴계 선생은 이러한 죽계계곡의 아름다움을 중국 남송(南宋) 때 주자(朱子)가 붙였다고 하는 푸젠성[福建省복건성]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비유하여 죽계구곡의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죽계구곡은 옛날의 고아한 벽계수와 수려한 경관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필자가 35년 전 처음 이 계곡에 와보았을 때만 해도 정말 낙원이 따로 없다 할 정도로 고요하고 청아한 청정계곡이었다. 죽계구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사람이 함께 걷기조차 힘들었던 호젓한 오솔길이었다. 오솔길의 갓길에는 수천 년 생사를 거듭했을 이름 모를 수목과 잡풀이 울창하게 뒤엉켜 있어서 봄에는 각종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다투어 뿜어내는 꽃내음이 하나로 어울져 달콤한 꿀향기를 풍기곤 하였다.

그 안쪽의 계곡에는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물줄기가 수줍음을 타는 산골처녀처럼 하얀 속살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워 꼭꼭 숨은 채 천년의 신비를 토해내며 흘렀다. 가을날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할라치면 계곡에서 곳곳의 제멋대로 놓인 크고 작은 바윗돌을 감아들며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환상적이었다. 겨울이 되면 두껍게 얼어붙은 하얀 얼음 위를 다시 얕게 덮고 흘러내리는 물이 또 얼어붙어서 층층이 쌓여진 얼음절벽은 동화 속의 얼음동산을 만들어 내곤 하였다.

물속에는 손바닥만한 버들치와 참갈겨니들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헤엄쳐 놀고 돌을 들추면 주먹만한 가재들이 그득하였다. 다른 날에는 초암골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가 자칫 시간이라도 늦어 밤길을 걷게 되노라면 반딧불이가 지천으로 나는 탓에 이것이 도깨비불처럼 느껴져 걷기조차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 아름다운 죽계구곡을 오르내리는 오솔길에 15년 전, 초암사로 들어가는 자동차도로가 생겼다. 이 때문에 죽계계곡의 온갖 풍상을 간직하고 있던 나무와 풀들은 다 베어지고, 초암사로 시주하러가는 자동차들만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어 허연 시멘트 먼지가 날고 매연냄새가 쾨쾨하다. 이 바람에 보일 듯 말 듯 살포시 숨어있던 계곡의 은밀함도 사라지고 옛 선인들의 유유자적하던 평화로움과 태고의 정적이 머물던 자연의 신비로움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계곡물에는 더 이상 가재도 다슬기도 없다. 손바닥만한 물고기 버들치는 물론 반딧불이도 사라졌다.
천연의 보고인 죽계구곡이 초라하게 된 데에는 초암사 중건(重建)이 주범노릇을 했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초암사 터는 후기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대사가 신라왕실의 명을 받들어 호국사찰을 짓기 위해 이곳 소백산에 들어와서 명당 터를 찾아 헤맬 때 임시거처로 이용하던 곳이라 한다. 어느 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초암사는 조그마한 대웅전과 요사채 등 가람의 규모를 대충 갖추면서 부석사의 말사(末寺)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초암사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일차 시들해지고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의 은신처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하여 국군에서 사찰사람들을 소개(疏開)시키는 바람에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30여 년 전 늙은 비구니가 주지로 오면서 사찰을 중건한답시고 15여 년 전부터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공사용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초암사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넓혀나갔다. 그 도로공사에 앞장 서준 것이 영주시다. 굴삭기(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길을 확장하고 시멘트로 포장하는 바람에 우거진 수목은 모두 베어지고 돌과 바위는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러한 바위 가운데에는 퇴계 선생이 이곳에 들려 쉬어갈 때 돌 위에 장기판을 그려놓고 장기를 두었다는 큰 바위도 있었다. 이렇게 낡은 사찰 하나를 중건하는 바람에 수백 년 역사 속에 살아 숨쉬어온 안축, 주세봉, 퇴계 등 조선 선비의 낭만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벽계수의 흐름 속에 태고의 원시가 살아 숨 쉬는 천연의 순수함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죽계구곡이 죽은 데에는 원인이 또 하나 있다. 초암사로 올라가는 죽계구곡의 주변은 곳곳에 영세농들이 지어먹던 계단식 벼논들이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며 죽 잇대어 있어서 그 풍광 또한 산골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었다. 그런데 자본의 논리가 이곳 산골에까지 파고들어오면서 이들 논들도 수익성이 좋은 사과밭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죽계구곡을 끼고 오르내리는 자락길은 그윽한 산골의 풍광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또 과수원 주인들은 오랜 관습대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여 사과농사를 짓는 탓에 비가 올 때마다 사과밭에 뿌려진 제초제 등 잔류농약과 비료성분이 계곡으로 흘러내려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하여 지금은 계곡물 속이 물이끼가 끼고 황량하다. 또 고압의 전붓대가 계곡을 따라 초암사까지 가는 바람에 계곡의 다슬기도 사라지고 있다. 다슬기가 죽어 없어지니 반딧불이 유충도 자리지 못하여 이곳 심산유곡는 개똥벌레가 없는 계곡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계곡 주변의 농부들이 이른 봄 사과나무 가지치기[전지剪枝;일본식 용어임]를 하고 난 가지들을 계곡에 버리니, 계곡의 경관이 매년 상해가고 있다.

인간의 더러운 욕심과 무지에 의하여 이렇게 영주 자락길 1번선인 죽계구곡은 죽어가고 있다. 여기에 영주 소백산 자락길이 제주 올레길과 같은 생태관광 길로 조성되면서 경상북도는 모두 10억 원 이상을 투자해 죽령에서 소수서원, 부석사로 이어지는 백10킬로미터의 영주 소백산 자락길을 생태탐방로로 조성한다고 있다. 좋은 기회다. 자연은 재생능력과 생태복원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경상북도와 영주시는 국립공원의 관련부처와 상의하여 옛 사진들을 수집하여 죽계구곡의 원형을 되살리는 노력을 하고, 초암사를 비롯하여 계곡 주변의 민가에서 폐수를 방출하지 않게 조치하고, 주변의 과수원은 농약을 선별하여 적게 치도록 한다면 죽계구곡의 옛 정취를 조금씩 살려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2004. 7.4 처음쓰고, 2012.3.5. 다시 쓰다.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네이버 이미지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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